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중략)
정한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625전쟁 때 발표된 '전선야곡'이라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이다. 아마도 나이 지긋하신 세대의 어르신들께서는 누구나 즐겨 불렀을 법한 대표적인 대중가요다. 이 노래 2절에 '정한수'란 낱말이 나오는데, 이는 사전에는 없는 단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한수 또는 정안수로 많이 알려진 이 말은 '정화수(井華水)'가 바른 말이기 때문이다.
희고 붉던 뒤뜰에는 어머니 앞치마 같은
(중략)
대접에 떠 놓은 정안수 같이 맑고 깨끗하신 어머니
- 박기식 <정안수> 중에서
정화수는 정한수나 정안수로 잘못 알려진 상태에서 시에도 나오고 소설에도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대중가요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정안수'는 일부 사전에 '정화수의 변한 말'로 처리되기도 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꼴이라 할 만하다. 어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발음에 이끌려 그릇된 표기로 알려진 탓일 것이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 1999>은 정한수는 정안수든 모두 '정화수의 잘못'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화수는 예부터 신에게 바치거나 약을 달이는 물로 쓰는, 이른 새벽에 길어 부정을 타지 않은 우물물을 가리킨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 육각수니 이온수니 하는 물들을 찾지만 정화수야말로 조상 때부터 으뜸으로 쳐 오던 물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누군가 먼 길을 떠날 때 정화수를 장독 위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이런 의식은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입시철이면 절이나 교회를 찾아 치성을 드리는 부모님들 모습에서 '정화수 떠 놓고 기도하던' 민간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용어의 유래나 의미를 잘 모르고 입에 굳은 대로 쓰기 쉬운 말로는 '억지춘향/억지춘양'이 또 있다. 주로 '~으로, ~이다' 꼴로 쓰이는 이 말은 '일을 순리로 풀어가는 게 아니라 억지로 우겨겨우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 '억지춘향'은 춘향전을 근거로 한다. 변사또가 춘향으로 하여금 억지로 수청을 들게 하려고 핍박을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억지춘향'도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영동선을 개설할 때 애초 직선으로 설계된 노선을 경북 봉화군 춘양을 지나도록 억지로 끌어댄 데서 나왔다'는 설이 그것이다. 영동선은 경북 영주와 강릉 경포대 사이를 잇는 산업철도로 1963년에 개통됐다. 실제로 '억지춘양'은 '억지춘향'과 함께 김민수의 <우리말 어원사전 1997>에 올라 표제어로 다뤄지기도 했다.
<표준국어대사전 1999>을 비롯해 요즘 나오는 모든 사전에는 '억지춘향'을 올림말로 다루고 있다. 물론 '억지춘양'이란 말은 없으므로 이를 틀린 말로 보면 된다. 북한에서 펴낸 <조선말대사전 1992> 역시 '억지춘향'만을 올리고 있음을 볼 때 '억지춘양'은 남쪽에서 와전된 말이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화수는 신앙행위의 대상 또는 매체가 되는 우물물이다. ‘정안수’라고도 한다. ‘정화수 떠놓고 빈다.’는 말이 일러주고 있듯이, 화학적인 맑음보다는 신앙적인 맑음과 정갈함을 더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정화수는 음료로서 맑은 것이 아니라, 신앙행위의 대상 또는 매체로서 맑은 것이다. 신앙의 대상 또는 매체로서 정화수에 앞서서 신앙의 대상인 우물 그 자체가 있어야 한다. 신성시된 우물 또는 신령의 집인 우물이라는 관념이 정화수라는 관념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알영정 · 개성대정, 동제 모시는 마을 우물들을 신앙의 대상이 된 우물의 보기로 들 수 있다.
첫째, 정화수는 신령에게 빌 때, 신령에게 바치는 제수 또는 공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가장 간소하나 가장 정갈한 제수로서, 신령에게 비는 사람이 지닌 치성의 극을 상징하게 된다. 이때, 새벽의 맑음과 짝지어진 정화수의 맑음에 비는 사람의 치성의 맑음이 투영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부정과 대극이 되는 정함이나 맑음은 우리 나라 사람의 전통신앙에서 매우 큰 뜻과 구실을 지니고 있다. ‘맑은 마음과 몸으로 정성들여 빈다.’고 하는 흔한 말에서, 맑음과 정성을 믿음의 마음의 두 기둥이라고 말할 만한 근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정화수는 무엇보다 맑음의 상징이 됨으로써, 신령과 인간 사이의 뜻의 오고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정화수는 신앙의 대상이기보다 신앙의 매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념이나 집안의 작은 고사에는 드물지 않게 소반상에 차려진 정화수와 황토만이 쓰인다. 이 경우 정화수만이 유일한 제수구실을 하는 것이다. 조왕신주1에게 바치는 정화수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둘째, 정화수는 정화력을 발휘하는 주술물 구실을 다한다. 물 자체가 지닌 맑음으로 해서, 환경이나 사람 · 물건 등의 부정을 물리치거나 막는 힘이 있다고 믿어진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볼 수 있는 세례(또는 영세)하는 물과 같은 관념이 정화수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이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향하여 그릇에 담은 정화수를 손가락 끝으로 세 번 흩뿌리는 것으로 정화의 주술이 베풀어진다. 이와 비슷한 간략한 정화주술에 쓰이는 것으로는 달리 소금을 지적할 수 있다. 정화수의 관념이 우물숭배 이외에 크게는 물 숭배, 작게는 약수숭배를 배경으로 삼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에 정성스레 길어온 우물물 한 사발을 장독대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은다. 드라마, 특히 사극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장면이다. 지금도 입시철이면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 모습에서 민간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장면에서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정한수 떠 놓고….”
깨끗하고 차가운 물이어서 정한수(淨寒水)로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정한수는 우리 사전에 없다. ‘정안수’도 없다. 둘 다 뜻도 모른 채 입에 굳은 채로 쓰고 있는 것. 바른말은 ‘정화수(井華水)’다. 가족의 평안을 빌거나 약을 달일 때 쓰는, 부정 타지 않은 우물물을 뜻한다.
‘정화수’ 하면 떠오르는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으로 변해 ‘원말’로 남은 말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봄날은 간다)라는 노랫말과 정비석의 단편소설 ‘성황당’ 등에 남아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이 원말이 변한 말에 밀려 거의 쓰이지 않는 사례는 많다. 음달이 응달로, 화살통인 전통(箭筒)이 전동으로 바뀌면서 변한 말이 원말보다 언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낭당에 모시는 신을 일컫는 ‘성황신’과 ‘서낭신’, 서낭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일컫는 ‘성황제’와 ‘서낭제’도 똑같은 처지다.
서울 남산 꼭대기에 가면 국사당(國師堂) 터가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12월 조정은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하고 제사를 지내 받들기로 했다. 국사당은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는 뜻. 올 2월 종영한 ‘장사의 신-객주 2015’에서 극 중 매월(김민정)이 국사당 마마님이었다.
무당이 하는 굿의 하나인 ‘푸닥거리’란 낱말도 재미있다. 낱말대로라면 ‘푸닥+거리’ 구조여야 하는데, 우리말엔 ‘푸닥’이라는 명사가 없다. 그렇다면 어원이 불분명한 말은 소리 나는 대로 써야 하는 한글맞춤법에 따라 ‘푸다꺼리’로 써야 하는데 푸닥거리가 표준어다. ‘뒤치닥’이라는 명사가 없어 뒤치다꺼리를 표준어로 삼은 예와는 다르다.
‘비난수’는 무당이 귀신에게 비는 말이다. 죽은 이의 말을 무당이 대신 전달해 주는 것을 ‘손대잡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무당이 굿을 의뢰한 사람에게 꾸지람을 늘어놓는 걸 푸념이라고 한다. ‘내림대’는 굿을 하는 동안 무당이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붙잡고 있게 하는 대나무나 소나무 가지다. 미지의 세상을 향한 안테나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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