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전들은 ‘설거지'를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로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설겆-'에 접미사 ‘-이'가 붙어서 생긴 말이다. 그렇다면 ‘설겆'은 무엇일까? 현대국어에서 ‘설겆다'는 쓰이지 않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던 15세기의 문헌에는 ‘설엊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설겆다'란 동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설엊다'는 ‘설겆다'의 ‘겆'의 ‘ㄱ'이 ‘ㄹ' 뒤에서 탈락하여 ‘설엊다'로 표기된 것이다. 이것이 원래부터 ‘설엊다'였으면 ‘설엊다'로 표기되지 않고 ‘서럿다'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ㄱ'이 없었으면 연철하여 표기 하고, ‘ㄱ'이 있었던 것이 탈락한 경우이면 연철하여 표기하지 않기 때문 이다.
즁님낸 다 나가시고 갸사랄 몯 다 설어젯더이다<1459월인석보, 23, 74b>
사발 뎝시 설어즈라<1517번역노걸대, 상, 43a>
머구믈 마차든 또 그릇 달 설어저 오라(收拾家事來)<1517번역노걸대, 상, 43a>
‘갸사(家事)'는 ‘식기류(食器類)'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사발, 접시, 그릇' 등인 것을 보거나 또 "먹음을 마치거든 또 그릇들 설어저 오라 (먹기를 마치거든 또 그릇들을 정리하여 와라)"와 같은 예문을 보면, ‘설엊다'는 오늘날의 ‘설거지하다'와 동일한 의미인 것 같다. 이뿐만 아니라 짐이나 물건을 정리하는 것도 ‘설엊다'라고 하였다. 아래의 예문들을 보면 그 뜻이 ‘수습하다, 정리하다'란 뜻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빨리 짐달 설어즈라<1517번역노걸대, 상, 38a>
설엇다(收拾)<1657어록해(초간본), 23a>
그런데 15세기 국어에는 ‘수습하다, 정리하다'란 뜻을 가진 고유어가 있었다. ‘설다'가 그 단어이다.
香내 섯 버므러 잇고 가사랄 몯 다 서러 잇난 다시 하옛더니 <1459월인석보, 23, 74a>
주거미 집 안해 가닥하엿꺼늘 셰간만 다 서러 가니라 <15xx삼강행실도, 열, 27a>
이 ‘설다'가 ‘설엊다'의 ‘설'과 같은 뜻을 가졌다는 사실은 ‘설다'의 ‘설-'과 ‘설엊다의 ‘설'이 방점이 동일하고, 또 다음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일한 문맥에 ‘설엊다'와 ‘설다'가 같이 쓰인 것에서 알 수 있다.
主人아 등잔블 켜 오라 우리 잘 대를 서럿쟈<1670노걸대언해, 상, 22b>
쥬신하 블 혀 가져 오고려 우리 잘 대 서러 보아지라<1517번역노걸대, 상, 25a>
그래서 ‘설엊다'는 ‘설다'와 ‘겆다'로 분석됨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겆-'은 무엇일까? 어떤 학자는 이 ‘겆-'은 원래 ‘걷다[收]'의 어간 ‘걷-'이 뒤에 접미사 '-이'가 와서 구개음화되어 ‘걷이'가 ‘거지'가 되어서 된 것이라고, ‘설걷이'가 ‘설거지'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설겆다'는 ‘설거더, 설거드니' 등으로 표기된 적이 없고, 또 구개음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설어젯더이다, 설어저, 설어주믈' 등으로 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겆다'라는 동사가 문헌에서 쓰인 예를 발견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 아마도 ‘설다'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설다'와만 통합되었던 유일 형태소였던 것 같다.
15세기에는 ‘설거지'는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 ‘설거지하다'란 동사도 있을 리가 없다. ‘설거지하다'에 대응되는 옛말은 ‘설엊다'였는데, 18세기에 ‘설다'와 함께 사라지게 된다. 방언에는 아직도 이들 형태가 남아 있지만 (설겆다<전남 목포 진도>, 설다<전남 함평>, 설르다<제주>), 표준어에서는 우연하게도 ‘설엊다'와 ‘설다'가 운명을 같이 한 것이다.
이의 명사형이 보이는 것은 19세기 말이다. ‘설거지하다'가 생긴 것도 당연히 그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설거지하다'가 ‘수습하다 정리하다'의 뜻으로는 쓰이지 않고 ‘음식을 먹고 난 후에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행위' 만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수습하다, 정리하다'의 뜻은 한자어로 대치된 것으로 보인다.
설거지(滌器)<1895국한회어, 177>
점순 어멈이 밥상을 보면 양천집은 설거지를 하고<1925계집하인, 13>
아침 설거지에 젖은 손을 치마로 닦으며 주인 마누라는 오만상이 찦으려진다.<1937따라지, 282>
밤이 들어서 잔치 뒤설거지 해주는 동네 녀편네들까지 다갓다.<1939임거정, 534>
우리나라 아내들은 남편들에 대해 불만이 많은 편이다. 왜냐하면 남편들이 가사일을 잘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권운동으로 가사분담을 하는 가정이 많이 늘어났다고 하나, 아직도 상당수 남편들이 부엌일을 하면 무엇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설거지 경우가 그렇다. 남자들은 숟가락을 놓으면 후닥닥 일어나 자기 일을 하게 된다. 반면 아내는 이를 꾸역꾸역 치워야 한다. 바로 ‘설거지’다.
‘설거지’, 어디서 온 말일까? 언뜻봐도 오늘 문제인 ‘설거지’는 한자에서 온 말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말 명사형 어미중에 ‘지’ 자로 끝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원의 힌트가 단숨에 떠오르지 않는다. 자! 우리는 비가 막 올라치면 ‘비설거지’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가령 “비가 곧 쏟아질 것 같다. 비설거지좀 해라. 특히 빨래를 꼭 걷어야 한다.” 정도가 된다.
이는 설거지라는 단어가 꼭 음식을 치우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설거지에는 두가지 설명구가 나온다. 사전은 설거지에 대해 ‘음식을 먹고 난 뒤 그릇 따위를 씻어서 치우는 일’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물건을 거두어 치우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설거지는 ‘수습하다’ 또는 ‘정리하다’ 뜻을 지닌 순우리말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진행을 해도 미심쩍은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다. 설거지의 어원이 여전히 안개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중세어 ‘설다’와 ‘겆다’가 결합된 말이다. 이중 앞말 ‘설다’는 ‘수습하다’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뒷말 ‘겆다’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설거지는 ‘모래사장’, ‘역전앞’처럼 어의가 중첩되게 결합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방향은 약간 다르지만 설거지를 영어로는 ‘dishwashing’라고 한다. 직역하면 ‘접시딱기’ 정도가 된다.
새벽이슬 아롱진 울 밑 제비꽃 같았을 열아홉에 엄마는 우리집에 시집을 오셨다는데, 종가에 발을 ‘잘못’ 들인 뒤 넌더리가 날 만큼 한 게 있다 하셨지요. 수십 명이 먹고 난 많은 그릇을 끼마다 씻고 말리는 설거지였다고 합니다.
열두 달을 찬물로 세수, 빨래, 설거지를 하던 전방생활이 아직 아찔합니다. 두셋이서 하루 세 끼 부대원 숟갈 30여 개와 플라스틱 식판 30여 개를 스펀지에 빨랫비누 묻혀 닦는 일을 몇 달 하던 때가 있었지요. 한겨울 뻘건 돼지찌개 같은 반찬이 나온 날은 참으로 큰 낭패였습니다. 청결과는 당초 거리가 먼 설거지였지만 어디가 아프다고 한 사람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설거지’는 ‘커튼을 걷다’ ‘소매를 걷다’처럼 늘어진 걸 말아 올리거나 열어젖히다, 또 ‘빨래를 걷다’ ‘돗자리를 걷다’같이 널거나 깐 것을 딴 데로 치우거나 한곳에 둔다는 뜻을 가진 옛말 ‘설엊다’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설엊’이 발음 편의상 ‘설겆’으로 변하고 행위를 이르는 ‘이’가 붙어 ‘설겆이’로 쓰이다 ‘설거지’로 연음돼 표준어가 됐습니다. 이북에서는 지금도 ‘설겆이’라고 한다지요.
설거지는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비설거지’라고도 하지요. 어릴 적 빨랫줄에 걸린 동생 면기저귀 같은 것이나 멍석에 널어놓은 고추, 목화 같은 게 비에 젖어 혼난 경험 없나요. 비설거지를 잘 해야 한다는 엄마의 신신당부를 잊고 놀다 깜빡했던 것인데. 우리의 내일에 결정적 영향을 줄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깔끔하게 설거지하듯 마무리가 잘 돼야 합니다.
식사 후 설거지를 했다
식사 후 설겆이를 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을 뜻하는 이 단어의 규범표기는 '설거지'가 맞다. '설겆다'에서 파생된 '설겆이'는 예전에 사용됐던 단어로 설거지가 올바른 표현이다. '설거지'의 어원인 '설겆-'은 표준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설겆-'을 염두에 둔 '설겆이'는 표준어로 인정 받을 수 없다.
●설거지
▶︎명사
①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 ≒뒷설거지.
・ 살림살이가 규모 있는 집일수록 잔치 설거지가 매서운 법이다.
・ 설거지를 끝내고 영선이 손을 닦으며 방에 들어왔을 때 사방에서 어둠이 밀려왔다.≪박경리, 토지≫
②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 =비설거지.
►어원
・ ←설겆-[<설엊다<월석>←설-+*겆-]+-이
●설겆다
▶︎동사
→ 설거지하다. [자료참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순우리말 ‘비설거지’가 ‘훈맨정음’에 문제로 출제되며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15일 오후 방송된 MBN 예능프로그램 ‘훈맨정음’에는 젝스키스 멤버 장수원과 개그맨 이진호가 특별 게스트로 등장한 가운데 ‘비설거지’의 뜻이 문제로 출제됐다. 은지원은 “홍수가 나서 물 바가지를 푸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황제성은 “아주 어리석다. 한자를 놓쳤다. 눈 ‘설’이다”라며 “비나 눈이 왔을 때 거지들?”이라고 유추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때 MC 김성주가 “‘달려나가다’가 좋은 힌트”라고 말하자 황제성은 다시 “비가 오자 밖에 널어놓은 농작물, 빨랫감을 걷으러 가는 거다”라고 말해 정답을 맞혔다. 비설거지의 사전적 의미는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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