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뼉 젖는다"
로 시작되는 대중가요 ‘칠갑산'의 가사 중, ‘아낙네야'를 ‘여편네야'로 바꾸면 이 노래의 맛은 어떻게 변할까? ‘아낙네'나 ‘여편네'나 모두 ‘부녀자'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그 뜻은 사뭇 다르다. ‘여편네'를 ‘결혼한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하면, ‘아낙네'는 ‘남의 집 부녀자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이란 것이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다.
‘여편네'가 ‘여편'과 ‘네'로 분석되듯이 ‘아낙네'는 우선 ‘아낙'과 ‘네'로 분석될 수 있다. ‘아낙네'와 거의 같은 뜻으로 ‘네'가 붙지 않은 ‘아낙'이 독립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건배의 아낙은 영신이가 친정에나 왔다가 가는 것처럼,수수엿을 고와 가지고 와서 <1936상록수, 1, 128>
내 아낙의 불미한 행동이 잇셔 쳐가에를 안이 가노라 말을 할 듯 십소<1910홍도화, 下, 33>
아낙은 더 이상 분석될 수 없을까? ‘아낙'과 의미상 연관이 있는 ‘아내' 가 원래 ‘안해'였고, 이것은 ‘안'과 ‘해'로 분석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낙'도 ‘안'과 ‘악'으로 분석될 수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은 ‘안 해'의 ‘안'이나 ‘안 사람'의 ‘안'처럼 ‘內'의 뜻을 가지며 동시에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낙'은 ‘안악'으로도 표기 되었었다.
홍생원이 편지 한 쟝을 손에 들고 드러오며 자긔 안악을 부르더니 <1908홍도화, 上, 371>
자네 사위가 자긔 안악 병구원을 밤잠을 못자며 돈도 앗가온쥴 모르고 지셩으로 하다가<1911모란병, 66>
자긔난 남자 사회를 개도하고 자긔 안악은 녀자 사회를 고동하야<1911원앙도, 53>
'-악'은 '-억'과 함께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인데, 주로 작은 것을 뜻할 때 쓰인다. ‘터럭(털 + -억)', ‘주먹(줌 + -억)', ‘뜨럭(뜰 + -억)', ‘쪼각(쪽 + -악)'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파생어들에서 보듯이 접미사 ‘-악/-억'이 붙어서 사람을 일컫는 단어로 된 예가 없는데, 왜 ‘아낙'만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원래 ‘아낙'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아낙'이 생겨났을 때의 원래의 뜻은 「표준국어대사전」 등에 풀이되어 있듯이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을 이르는 말'이었다. 20세기 초의 문헌에서는 이러한 용례로 사용된 예들이 흔히 보인다.
두 분이 다 이러나셔 나와 갓치 안악으로 좀 드러갑시다<1908치악산, 上, 187>
너 이년 댁에 왓스면 안악에난 웨 안이 드러오고 엇의가 숨엇더냐<1910흥도화, 下, 51>
(상졔) 령감 어디 계시냐 (삼랑) 안악에 계신듸 밧게 상졔님 오셧다난 말삼을 드르시고 드러 오실 것 업시 바로 가시라 하셔오<1908구마검, 25>
졈순이가 경사 나난 드시 안악으로 살작 드러가다가 안마루에 김승지의 신이 보힌 거슬 보고 아니 드러가고 도로 돌쳐 나아간다<1907귀의성, 上, 69>
아낙에 드러 왓다가 마님게셔 저럿케 근심하시난 거슬 보면 쇤네난 아무 정황이 업슴니다 <1907귀의성, 上, 76>
그러다가 ‘그 장소에 거처하는 사람'의 뜻을 갖게 되어 ‘안악'은 ‘장소'와 '사람'을 동시에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예문에서는 ‘안악'이 두 번 쓰이었는데, ‘안악에셔는 모르심니다'의 ‘안악'은 오늘날의 ‘아낙네'를, 그리고 ‘안악에 드러가'의 ‘안악'은‘내정(內庭)'을 뜻한다.
이 댁에난 빗이라고난 한푼도 업고 또 우리댁 령감께셔 출쥬나가시고 업슨즉 안악에셔난 모르심니다 슌금 한놈이 쎡 나셔며 녀바라 안악에 드러가 이럿케 엿쥬어라<18xx소상강, 46>
‘안악'이 ‘내정(內庭)'의 뜻을 잃고 ‘안뜰'에 그 자리를 넘겨준 뒤에 이 ‘안악'에 '네'가 붙어 여성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원래 '-네'는 15세기에 존칭 표시의 명사에 붙는 복수 접미사였었지만, 근대국어에 와서 평칭이나 자기겸양을 나타내는 말에 쓰이게 되면서 복수의 의미보다는 낮추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아낙네'는 ‘안뜰에 사는 부녀자'란 뜻으로 화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부 방언에서는 ‘아낙네'를 ‘내뎡(평북), 안들(‘內庭'을 번역한 ‘안뜰'; 강원, 경남북, 함남), 안깐(안間) 안낀네 앙깐이(함북) 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內)'에 접미사 ‘-악'이 붙어서 ‘안악'이 되었는데, 이때의 뜻은 ‘부녀자가 거처하는 조그마한 안뜰'이었다. 이것이 그곳에 사는 부녀자란 뜻으로 확대되어 같이 쓰이다가 장소를 뜻하는 ‘아낙이 다른 단어로 대치된 뒤에 여기에 사람을 뜻히는 접미사 ‘-네'가 붙어 ‘안악네'가 된 것이다. 이것이 표기상으로 ‘이낙네'로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아낙'과 ‘아낙네'는 모두 19세기부터 그 자료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9세기에 생긴 단어로 추정 된다.
아낙네, 어떤 의미를 담은 단어일까? 그 어근을 제대로 파헤쳐보자. YG 소속의 아이돌 그룹 WINNER 송민호는 지난 2018년 11월 ‘아낙네’ 타이틀의 곡을 발매했다. “나의 아낙네 이제 알았네 아낙네 나의 파랑새 (woo yeah)” 본 가사를 만약 ‘여편네”로 바꾸면 이 노래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낙네와 여편네 모두 ‘부녀자’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동일하지만 그 뜻은 사뭇 다르다. 여편네는 ‘결혼한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면 아낙네는 ‘남의 집 부녀자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송민호의 ‘아낙네’를 '여편네'로 바꾸어 가사를 해석해본다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여편네는 '여편'과 '네'로 분석되듯이 아낙네는 '아낙'과 '네'로 분석될 수 있다. 원래 '-네'는 15세기에 존칭 표시의 명사에 붙는 복수 접미사였지만 근대 국어에 와서 평칭이나 자기 겸양을 나타내는 말에 쓰이게 되면서 복수의 의미보다는 낮추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낙'과 의미상 연관성을 지닌 '아내'를 통해 '아낙네' 의미를 분석해보면 '아내'는 원래 '안해'였고 이것은 '안'과 '해'로 분석된다. 마찬가지로 '아낙'은 '안'과 '악'으로 분석된다. '안'은 ' 안 사람'의 '안'처럼 '內'의 뜻을 가지며 동시에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낙'은 '안악'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악'과 '-억'은 모두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인데 주로 작은 것을 뜻할 때 쓰인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단어로는 '주먹(줌 + -억), '터럭'(턱 + -억), '쪼각'(쪽 + -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파생어를 살펴보면 사람을 일컫는 단어로 된 예는 없는데 왜 '아낙'만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원래 '아낙'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아낙'이 생겨났을 때 원래 뜻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풀이되어 있듯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그 장소에 거처하는 사람의 뜻을 갖게 되어 '안악'은 '장소'와 '사람'을 동시에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여편네는 '결혼한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가끔 남편의 '옆'에 있어서 '여편네'가 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옆편네'가 '여편네'가 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하기도 한다. '여편네'의 '여편'은 한자어이다. 가례언해(1632년)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남편'에 대립되는 '녀편'이 있다.
여편네는 오늘날처럼 낮추어 보는 의미는 없었다. 그러다 '녀편네'가 오늘처럼 낮추어 말하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근대국어 시기인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원래 '-네'나 '-내'가 존칭 표시의 체언에 붙는 복수 접미사지만 근대국어에 와서 '쇼인네'나 '우리네 살림살이' 에서 평칭이나 자기 겸양을 나타내는 말에 쓰이게 되면서 복수의 의미보다는 낮추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편네'가 낮추는 말로 되었다. 남자를 낮출 때에 지금도 '남정'에 '네'를 붙여 '남정네'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본래의 어형인 '안악'은 특정의 공간을 나타내는 명사와 결합해 작은 장소를 지정하는 역할을 한다. '-악'의 기능을 고려하면 '안악'은 집안의 공간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어근을 파헤쳐 보면 비슷하면서도 그 의미와 경로가 다른 단어가 생각보다 많다. 이번 시리즈는 여편네와 아낙네의 어근을 통해 그 차이를 알아보았다.
청양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칠갑산은 안다. 33년 전 주병선이 발표한 노래 ‘칠갑산’ 덕분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로 시작하는 노랫말, 애절한 가락에 실린 ‘설움 많은 여인의 삶’은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그 때문에 청양의 주요 관광지도 칠갑산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칠갑산은 해발 561m로 그리 높지 않다. 그럼에도 충남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은 충만하다. 산 이름은 산천숭배 사상을 따라 천지만물을 상징하는 칠(七)과 육십갑자의 첫 글자인 갑(甲)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정상에서 청양의 4개 면에 걸쳐 능선이 뻗어 있다. 그만큼 등산로도 많아 장곡사, 대치터널, 천장호, 도림사지, 자연휴양림 등을 기점으로 8개나 된다. 어느 코스를 잡아도 대략 3~4㎞, 왕복 3시간가량 걸린다. 그중에서도 칠갑광장휴게소에서 시작하는 코스를 많이 찾는다. 청양읍과 정산면을 잇던 옛길의 한티고개 마루에 오래전 산장이 있어서 ‘산장길 코스’로 불린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약 3㎞, 보통 걸음으로 1시간을 잡는다. 해발 300m 능선에서 시작하는 길이니 순하고 부드럽다.
약 2㎞ 지점까지는 등산이랄 것도 없다. 잘 닦인 임도를 따라 걷는 완만한 오르막이다. 노랫말의 ‘칠갑산 산마루’도 이곳이었을 듯하다. 출발과 동시에 길 왼편에 ‘콩밭 매는 아낙네’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른 곳이었다면 산길에 등장한 호미 든 여인이 뜬금없어 보이겠지만, 칠갑산의 상징으로 이보다 적당한 소재는 없을 듯하다. 맞은편에는 ‘생명의 숲’이라는 조각에 칠갑산 노래가 새겨져 있다. 조금 위에는 칠갑산천문대가 자리 잡았다. 밤하늘도 깨끗한 청정 지역임을 알리는 징표다. 전문성보다는 대중성을 강조하려는 듯 ‘스타파크’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이어지는 임도는 특별할 것 없는 그늘진 숲길이다. 거친 숨소리 대신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평탄하다. 너무 심심하다고 여긴 걸까. ‘어머니길’이라 명명하고 다섯 곳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희로애락을 담은 인생길은 자식들의 그리움으로 마무리된다. 임도는 정상을 약 1㎞ 남긴 자비정까지 계속된다. 특이하게도 ‘칠각정’으로 세운 쉼터다. 백제 무왕이 쌓은 자비성에서 이름을 땄다는데, 성터는 찾을 길이 없으니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만 여긴다.
아무리 유순한 산이라도 정상을 코앞에 두고는 이름값을 하는 법이다. 자비정에서 조금씩 경사를 더하던 산길은 정상을 약 200m 앞두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급경사 구간이 길지 않아 아주 힘들지는 않다. 짜지도 맵지도 않게 적당히 양념을 더한 수준이다.
그늘 짙은 계단 터널이 끝나면 시야가 열리고 하늘이 뻥 뚫린다. 마침내 정상이다. 청양군 홈페이지에는 칠갑산 정상 풍광을 ‘장쾌하다’라고 소개한다. ‘남서쪽을 휘돌아 나가는 금강이 아련하고 동남쪽으로 민족의 영산 계룡산, 서북쪽으로 보령의 오서산, 날씨가 맑으면 서해바다까지 조망된다’며 감동의 파노라마라고 묘사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많이 과장됐다. 360도로 시야가 뚫린 건 사실이지만, 이름값에 비하면 의외라 할 정도로 평범하다. 헬기장을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고만고만한 능선이 물결치듯 찰랑거리는 수준이다.
올라온 길을 되짚어보니 물소리 시원한 계곡도, 아찔한 절벽도, 감탄사를 자아낼 기암괴석도 없었다. 인생길로 치면 마디와 굴곡을 잔잔한 파도처럼 부드럽게 넘은 길이다. 고비마다 무난하게 잘 헤쳐왔다는 안도감, 호들갑 떨지 않고 묵묵히 해냈다는 충만함을 안겨주는 산이다. 우리네 인생 여정도 그랬으면 싶은, 특별할 거 없는데 그래서 더 끌리는 산이다.
다시 칠갑광장으로 내려오니 정면에 면암 최익현(1833~1906) 동상이 보인다. 을사조약에 반대해 의병을 일으키고, 유배지인 대마도에서 끝내 단식으로 순절한 애국지사다. 태어난 곳은 포천이고 무덤은 예산에 있는데 그의 동상이 이곳에 선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인근 목면에 모덕사가 있다. 면암의 뜻을 기리는 사당으로 위패를 모신 모덕사, 영정을 봉안한 영당, 가족 위패를 모신 영묘재와 전시관 등이 함께 있다. 그의 거처였던 중화당은 지역 항일의병의 구심점이었다고 한다. 광복 직후 상하이에서 귀국한 김구 일행이 ‘환국고유제’를 올린 곳도 서울 종묘가 아니라 이곳이었다.
(사)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이사를 맡고 있는 면암의 5대손 최진홍씨는 부친에게 들은 당시의 일화를 그림처럼 묘사했다. 김구보다 나이가 어린 그의 조부와 독립운동가 이시영은 중화당 툇마루에 걸터앉았고,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지만 중인 출신이었던 김구는 댓돌 아래 마당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몸에 배인 신분제의 굴레에서 김구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회상이다. 면암은 1900년 이곳에 거처를 잡았는데 어떤 인연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후손들도 그때부터 청양에 뿌리를 내리고 대를 잇고 있다.
모덕사 입구에는 칠갑광장의 것보다 더 큰 면암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상이 아니라 시멘트 조각상이다. 1973년 군민의 모금으로 칠갑광장에 세워졌던 조각상은 2013년 지금의 동상으로 교체되며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양미술대를 졸업한 박칠성 조각가의 작품이다.
칠갑산 등산로는 청양의 대표 관광지 천장호출렁다리와도 연결된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길이 207m 현수교는 2009년 완공해 2017년 한국기록원으로부터 국내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로 인증받았다. 알고 보면 전국에 출렁다리 건설 경쟁을 촉발시킨 다리다.
관광자원이 많지 않은 청양은 일대를 알뜰살뜰 꾸몄다. 주차장에서 출렁다리 가는 길에는 ‘네트 에코 워크’를 설치했다. 그물망 다리와 타워를 건너는 177m 무료 체험시설이다. 별도의 안전장치를 착용할 필요가 없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 길에도 ‘콩밭 매는 아낙네상’을 세웠다. 허리를 펴고 이마에 땀을 닦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고추 모형의 주탑(높이 16m)을 통과하면 드디어 출렁다리다. 흔들림은 심하지 않지만 호수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가뭄이 심해 호수 가장자리에 뽀얗게 마른 흙이 층을 이루고 있어 안쓰럽다. 다리를 건너면 천장호의 황룡과 칠갑산 호랑이 전설을 형상화한 대형 조각상이 반긴다.
다리 양쪽으로는 수변을 따라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넉넉한 그늘이 따가운 햇볕을 가리는 길이다. 늘어진 나뭇가지 곳곳에 감성 문구를 매달아 놓았다. 조금은 낯간지러운 글귀지만 인증사진 찍기에는 그만이다. 산책로는 계단 하나 없이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만들었는데, 정작 입구는 징검다리 형식으로 시공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못내 아쉽다.
칠갑산 서쪽 기슭에는 서기 850년에 창건한 장곡사가 있다. 철조약사여래좌상과 미륵괘불탱, 상·하대웅전과 금동약사여래좌상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협곡에 터를 잡아 그리 크지는 않다. 하대웅전과 설선당, 강당, 범종루, 지장전, 요사채 등이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마주보고 있고, 그 위에 상대웅전과 응진전을 비롯한 4채의 전각이 자리 잡았다.
알뜰하게 꾸민 천장호출렁다리
칠갑산 등산로는 청양의 대표 관광지 천장호출렁다리와도 연결된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길이 207m 현수교는 2009년 완공해 2017년 한국기록원으로부터 국내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로 인증받았다. 알고 보면 전국에 출렁다리 건설 경쟁을 촉발시킨 다리다.
관광자원이 많지 않은 청양은 일대를 알뜰살뜰 꾸몄다. 주차장에서 출렁다리 가는 길에는 ‘네트 에코 워크’를 설치했다. 그물망 다리와 타워를 건너는 177m 무료 체험시설이다. 별도의 안전장치를 착용할 필요가 없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 길에도 ‘콩밭 매는 아낙네상’을 세웠다. 허리를 펴고 이마에 땀을 닦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고추 모형의 주탑(높이 16m)을 통과하면 드디어 출렁다리다. 흔들림은 심하지 않지만 호수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가뭄이 심해 호수 가장자리에 뽀얗게 마른 흙이 층을 이루고 있어 안쓰럽다. 다리를 건너면 천장호의 황룡과 칠갑산 호랑이 전설을 형상화한 대형 조각상이 반긴다.
다리 양쪽으로는 수변을 따라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넉넉한 그늘이 따가운 햇볕을 가리는 길이다. 늘어진 나뭇가지 곳곳에 감성 문구를 매달아 놓았다. 조금은 낯간지러운 글귀지만 인증사진 찍기에는 그만이다. 산책로는 계단 하나 없이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만들었는데, 정작 입구는 징검다리 형식으로 시공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못내 아쉽다.
대웅전이 두 개, 장곡사와 장승공원
칠갑산 서쪽 기슭에는 서기 850년에 창건한 장곡사가 있다. 철조약사여래좌상과 미륵괘불탱, 상·하대웅전과 금동약사여래좌상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협곡에 터를 잡아 그리 크지는 않다. 하대웅전과 설선당, 강당, 범종루, 지장전, 요사채 등이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마주보고 있고, 그 위에 상대웅전과 응진전을 비롯한 4채의 전각이 자리 잡았다.
사찰 바로 앞까지 차로 갈 수 있어서 경내를 찬찬히 둘러봐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팽나무 거목과 수키와 담장이 어우러진 상대웅전에서 내려다보는 절간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장곡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웅전을 두 개 보유한 사찰이다. 원래 두 개의 다른 사찰이 있었다는 설, 인근 폐사지의 대웅전을 옮겨왔다는 설이 있다. 약사불의 영험함을 듣고 기도하러 몰려든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이 비좁아 하대웅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칠갑산에서 만난 한 주민은 계율을 어긴 스님을 벌하는 호법부의 감호시설이 있었다는 설도 알려줬다. 즉 상대웅전은 원래 장곡사 스님이, 하대웅전은 죄를 지은 스님들이 예불을 보는 곳이었다는 주장이다. 골짜기가 깊어 장곡사다. 기록이 없으니 추측만 난무하다.
장곡사 초입에는 칠갑산장승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청양은 약 100년 전부터 장승제를 올리는 등 국내 최고의 장승문화 보존지역으로 꼽힌다. 공원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기본으로 청양의 마을 장승, 1870년부터의 시대별 장승, 창작 장승, 전국 각처에서 모은 장승 300여 기를 세워 놓았다. 장승 역시 당대의 사회성을 표현한 조형물이다.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자신과 닮은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심각하지 않고 가볍게 둘러볼 수 있는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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