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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오이지, 짠지, 단무지, 장아찌, 찌개_어원 자료

by 61녹산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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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어원

 

 

 

‘오이지, 짠지, 단무지, 장아찌, 찌개'는 반찬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원상으로도 관련이 있는 단어들이다. ‘오이지'는 ‘오이'와 ‘지'로, ‘짠지'는 ‘짜다'의 어간 ‘짜-'에 관형형 어미 ‘-ㄴ'이 붙은 ‘짠과 ‘지'로, ‘단무 지'도 ‘무'에 ‘지'가 붙어서 ‘무지'가 되고 여기에 ‘달다'의 어간 ‘달-'에 괸형형 어미 'ㄴ'이 연결된 ‘단'이 붙어서 된 단어이다. 그런데 ‘지'가 ‘김치'를 뜻하는 단어임을 알고 있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지'는 아직도 일부 방언(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일부 지역)에서 쓰이고 있지만 ‘김치'의 사투리라고 하기 어렵다. ‘지'는 고유어이고 ‘김치'는 한자어인데, 오늘날 한자어가 토박이말인 ‘지'를 몰아낸 것일 뿐이다. ‘뫼'가 ‘산'의 방언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 그래서 ‘오이지'를 ‘오이김치'라고 하거나, ‘짠지'를 ‘짠 김치'라고 하면 그 뜻이 약간 달라지는 것 같다. ‘오이지'는 전통적으로 오이를 간(소금)에 절여서 만든 것인데 비해, ‘오이김치'는 이에 여러 양념을 넣어 담근 김치를 연상하게 된다. ‘짠 김치'는 ‘짜게 담은 김치를 떠올려서 ‘짠지'와는 그 뜻이 전혀 달라졌다. 그리고 ‘단무지'를 ‘단 무 김치'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지'가 붙어서 된 단어들이 많은데, ‘오이지, 짠지, 단무지' 이외에도 방언형에서는 ‘싱건지, 똑딱지' 등의 단어들도 쓰인다

 

오이로 담근 김치는 ‘오이지', 짜게 담은 김치는 ‘짠지(강원도, 경기도, 경북, 전남, 전북, 충북, 함남, 황해, 충남의 일부 지역)', 싱겁게 담근 김치는 ‘싱건지(호남의 일부 지역에서 ‘동치미'를 일컫는다)', 똑딱똑딱 썰어서 담근 김치는 ‘똑딱지(표준어로는 ‘깍두기')', 단무로 담근 김치는 ‘단무지'인 것이다.

 

그런데 왜 ‘지'가 ‘김치'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지'는 고어에서는 ‘디히'였다. ‘디히'는 ‘간에 저린 채소를 뜻하는 말로서 뒤에 이것이 어중의 ‘ㅎ'이 탈락하여, ‘디이'가 되고 다시 구개음화되어 ‘지이'가 되고 이것이 오늘날 ‘지'가 된 것이다. ‘디히'는 15세기에도 쓰였다.

 

長安엣 겨옰 디히난 싀오 또 파라고 金城ㅅ 따햇 酥난 조화 깁 갇도다 <1481두시언해(초간본), 3, 50b>

이만 민셔방 지븨 빨 두 말 꾸이고 양의 소츌로 광희손듸 디히 달라 하여 네 뻐라 그리하라 민가의 유무 하노라 九 卄七日 父<1565순천김씨언간>

디이(甕菜, 轎藏 <유희 물병 고 3, 草)

동지예 쓸 술만 빚고 보행으로 보내여더니 간쟝 지이 보내시니 내 사촌님이시니 어려울 줄을 꾀닷디 몯할로다<1636병자일기, 132>

 

‘오이지'란 단어는 17세기에 ‘외디히'로 나타난다. 「역어유해」에는 ‘외디히'가 ‘쟝에 담은 외[醬瓜子]'<역어유해, 상, 52b>로 보인다. 19세기 말부터 이‘외디히'는 ‘외지, 오이지'로 나타난다.

 

집의 시믄 보도과 쉰무우과 댄무우과 외디히과 므른 흰밥과 차쌀쥭과 몯붇고 즈칄 제 머기라<1608언해두창집요, 하, 42a>

그 남편 되난 대신의 말이 여보게 자내난 비록 셜샤 막히랴고 여간 외지쪽이나 가지고 물 먹으려 가것마난 남들은 말하기를 당시 아모 대신의 부실이 별별 음식하여 가지고 노리로 물 먹-으러 다닌다 하야<1898독립신문 7월 29일 금요일 제3권 제100호>

노란 조밥을 사기 사발에 눌러 담고 그 우에 외지 한 쪽식 노커나 그러치 안오면 무 쪽 두 개식 놋는 것이 그들의 량식이니<1925지형근, 3, 88>

금순이는 먼저 만드는 법 없이 자기는 외지나 콩자반 그러한 것으로 간략한 조반을 치르고 그들이 일어나기를기다려서야 비로소 풍로에 남비를 놓고 물에다 장을 풀고 한다는 것을 알어내였다.<1937속천변풍경, 342>

사실 저 혼자 먹는 것은 외지쪽에 된장 하나로 한여름을 넣기도 이런 데에 쓰는 것은 아까운 줄을 모르는 봉순이었다. <1956화관, 292>

그리고 오이지가 긴 것이 있으니까 칼날까지 열어 젯기더니 숭덩숭덩 썰어가면서 먹었다. <1932불우선생, 11>

 

‘짠지'는 19세기 말에 그 예가 보여서 일찍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영자전」(1880)에 ‘짠지[鹹菜]'가 보이기 시작한 후로 20세기까지 사용되었다. 20세기에 와서는 물론 ‘짠지'도 보인다.

 

짠지 鹹菜<1880한불자전, 526>

짠지 鹹菜<1895국한회어, 254>

원산항 명셕원 사난 신즁근의 안해가 작년 십이월 이십칠일에 짠지 엇으려 간다 하고 다라난지라<1906경향신문, 1, 3>

그러나 먹든 대궁을 주서 모아 짠지쪽하고 갓다주니 감지덕지 밧는다. <1933산골나그네, 4>

자긔는 치마고리를 휘둘러가며 잽싸게 안주를 장만한다. 짠지 동치미 고추장. 특별한 안주로 삶은밤도 노앗다. <1933산골나그네, 6>

지직바닥이 부스럼 자죽보다 질 배업다. 술짠지쪽 가래침 담배재 뭣해 너저븐하다. <1933산골나그네, 7>

소태같이 쓴 짠지쪽과 펄펄 뛰고 싶도록 매운어리굴젓에 찬밥을 데워 먹고는 기운을 차려 다시 걷기를 시작하였다.<1933영원의미소, 295>

"얘 이것말구 얼큰한 짠지 좀 없늬?” 짠지가 잇을 리가 만무다. 그날그날 푼푼이 얻어서 김치것리라도 사면 복작복작 주물러서 한두끼 먹는 우리다. <1932흙을그리는마음, 106~107>

변또 반찬은 언제든 짠지쪽에 고치장이엿다.<1933사흘굶은봄달, 148>

아버지의 숫가락질하는 댈가락 소리도 짠지 씹는 쩍쩍 소리도 죄다 두 귀로 분명히 들엇다. <1935 떡, 68>

그래 똑 짠지쪽 깍뚝이국물 그런 것 해서 밥이랑 먹죠 <1937속천변풍경, 152>

 

‘단무지'는 문헌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단무지'는 일설에 의하면 일본에서 ‘다꾸앙'이 들어오고, 해방이 된 뒤에 국어 순화운동이 벌어지면서 인위적으로 순화시킨 말로 전해진다. ‘단무지'가 사전에 올림말로 올라 있 는 최초의 사전은 이희승 편의 「국어대사전」 (1961)이다. 그 뜻풀이도 단순히 ‘다꾸앙'으로 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에서 간행된 「조선말대사전」 (1992)이나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조선말사전」(1992)에도 아직 ‘단무지'는 올라 있지 않다. 최근에 나온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증보판)(2006) 에도 ‘단무지'는 올라 있지 않다. 대신 ‘다꾸앙'을 순화한 ‘겨절임무우'가 올라 있다. 연변에서는 ‘무우겨절임'이 올림말로 올라 있다. 그래서 ‘단무지'는 문헌에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지'는 단독으로도 사용되었지만, 대개는 후행요소로 와서 된소리가 되어 ‘찌'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장아찌'나 ‘찌개'의 ‘찌'가 바로 이 ‘디히'와 연관되는 것이다.

 

‘장아찌'는 언뜻 ‘장아'와 ‘찌'로 분석될 듯한데, ‘장아'를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아'는 ‘장앳'으로부터 변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아찌'는 원래 ‘장앳디히'였다. 그러니까 ‘장(醬) + 애(처소를 나타내는 처격 조사, 오늘날의 '-에'에 해당) + ㅅ + 디히'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뜻은 ‘장(간장, 된장, 고추장)에 담근 채소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장앳디히'가 변화하여서 ‘장앗디히, 장앗지이'로 되고 이것이 오늘날 ‘장아찌'가 된 것이다.

 

다만 됴한 쟝앳디히 밥하야 먹다가<번역박통사, 상, 55b>

쟝앗디이(醬苽子) <1748동문유해, 하, 4b>

쟝앗삐이(醬瓜子) <1768몽어유해, 상, 47b>

쟝앗지이(醬瓜) <1779한청문감, 12, 41b>

장엣지(醬菜)<1880한불자전, 527>

쟝엣지(醬菜)<1897한영자전, 723>

외쟝앗지(醬瓜子)<18xx광재물보, 飮食, 3a>

보기만해도 고리타분한 막걸리 웃국이요, 안주라고는 언제 보아도 낙지대가리 말린 것에, 마눌장앗지뿐이다.<1936상록수, 227>

옥심이도 강보리밥 먹기에는 앗가울 만한 힌 이빨로서, 술종 끄테 꿔든 장앗지를 진득진득 물어 뗀다. <1936옥심이, 3>

차차 살림자미가 나기 시작하면 녀편네가 장앗지 무쪽가치 짭잘해지네<1939임거정, 330>

 

‘징하찌'를 언급하면 또 연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찌개'이다. ‘찌개'도 역시 ‘지'와 연관되는 단어이다. ‘된장찌개, 고추장찌개, 비지찌개, 굴비찌개, 북어찌개' 등 그 종류도 많은데. ‘찌개'는 ‘고기나 채소를 쪄 내서 다시 끓인 반찬을 뜻하니까 여기서 말하는 ‘쪄 내다'의 ‘찌다'와 연관된 단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에 이 ‘찌다'의 ‘찌'에 접미사 ‘-개'가 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 게 만든 단어인 ‘찌개'는 아마도 '찌는 도구'를 뜻하는 말이어야 할 것이다. '찌개'는 '디히'가 '지'나 ‘찌'로 변화된 뒤에 생긴 단어로 추정된다. 그런데 접미사 ‘-개'는 대개 동사의 어간과 연결되는 것이 더 많아서 ‘덮개, 깔개, 발싸개, 이쑤시개' 등으로 쓰이지만 ‘찌개'처럼 명사에도 붙기도 한다. ‘부침개, 털이개' 등이 그것이다.

 

◆ 찌개

그리고 또 밥을 푸는 데도 시어머니 눈을 도적해 가며 시아버지 밥 다 제처 놓고 남편 밥부터 먼저 뜨고 찌개나 국을 끄려도 고기 건지는 말장 남편 상으로 돌린다.<1942탑, 180>

그러나 로파난 어제 저녁 형식이가 늦게 잔 줄을 알므로 꾀오랴고도 아니하고 모처럼 만들어 노흔 쟝찌개가 식난 것을 근심하엿다. <1918우정, 225>

저러케 조반이 다 식난대 하고 쟝찌개를 생각한다. 로파의 만드난 쟝찌개난 그다지 맛잇난 것은 아니엇다. 그러나 로파는 자긔가 된쟝찌개를 뎨일 잘 맨드난 줄로 자신하고 또 형식에게도 그러케 자랑을 하엿다. 형식은 그 된쟝찌개에서 흔히 구덕이를 골랏다. <1918무정, 225>

 

◆ 찌개

이 호박 잎 찌개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932흙, 100>

정식아 먹자 웨 마른 호박 고작이로 고추장찌개나 하지 않고 기애는 그걸 먹는데 <1933고향, 248>

질화로 가에는 달걀찌개가 끓다가 졸아붙었다.<1933영원의, 160>

겨울에 음식을 먹어도 식을 리 없고, 김치찌개라도 한번 이 그릇에 담아놓으면<1936금삼의피, 27>

 

 

 

오이지 장아찌

 

 

 

‘찌개’는 ‘찌는 것’, ‘찐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김민수의 <우리말 어원사전> 에서는 ‘찌[蒸](이것은 ㅂㅈ의 찌)+개(접사)’로 분석하여 ‘찌다’로 해석하고 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설명도 붙이고 있다. “현대어에서 이 말은 ‘고기나 채소를 쪄 내서 다시 끓인 반찬’정도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찌개’를 평북지방에서는 ‘모든 소금기 있는 채소나 고기류의 반찬’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찌개’가 ‘찌는 것’인가? 아니다. ‘끓이는 것’이다. 남영신 선생이 펴낸 <한+국어대사전> 의 풀이를 보면 ‘생선, 고기, 채소를 양념한 뒤 바특하게 끓인 것’이라 되어있다.

 

‘찌개’가 ‘찌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기서 ‘찌-’를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 가장 유력하게 대두된 설명이 유창돈 교수가 제기한 ‘디히개’의 변화형이라는 것이다. 유창돈은 그의 역저 <어휘사 연구> 에서 ‘디히+개’로 분석하고 있는데, ‘디히개>지이개>지개>찌개’의 변화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디히’는 ‘김치’의 순수한 우리말 고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디히>디이>지이>(지)>찌’의 변화과정을 쉽게 상정해 볼 수 있다. ‘디히’는 ‘김치’에 밀려 사어가 되었는데,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우리말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오이지, 짠지, 단무지, 싱건지, 장아찌’의 ‘지’, ‘찌’가 바로 그것이다.

 

김치는 무, 배추, 오이 등의 여러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버무려 발효시킨 식품이다. 비타민과 무기질의 보고인 채소는 원 상태로 저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장, 초, 향신료 등과 섞어서 새로운 맛과 향기를 생성시키면서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개발된 우리 고유의 식품이 바로 김치이다. 김치라는 이름은 원래 ‘지(漬)’, ‘저(菹)’라고 하다가 조선 초기에 딤채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중엽, 고추가 수입되면서 김치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고, 19세기에 들어서 오늘날과 같은 김치가 완성되었다.

 

사람은 비타민이나 무기질이 풍부한 채소의 섭취가 필요한데 채소는 곡물과 달라서 저장하기가 어렵다. 물론 채소를 건조시켜 저장할 수는 있지만 건조시키면 본래의 맛을 잃고 영양분의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  · 향신료 등과 섞어서 새로운 맛과 향기를 생성시키면서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우리 고유의 식품이 바로 김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를 ‘지(漬)’라고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김치담그기를 ‘염지(鹽漬)’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가 물에 담근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에는 유교가 도입되어 복고주의로 흘러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저(菹)’라는 명칭이 쓰였다. 즉 본래 지라고 부르던 것이 유교의 복고주의에 따라 고려말부터 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딤채’라는 말이 보이는데, 1518년(중종 13)의 『벽온방(辟瘟方)』에는 “ 무딤채국을 집안사람이 다 먹어라.”라는 말이 나오며, 1525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저를 ‘딤채조’라 하였다.

 

즉 우리 겨레는 소금에 절인 채소에 소금물을 붓거나 소금을 뿌림으로써 독자적으로 국물이 많은 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숙성되면서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채소 국물에 침지(沈漬)된다. 또 국물이 많은 동치미 같은 것에서는 채소가 국물 속에 침전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네 고유의 명칭인 침채가 생겨난 것이다. 박갑수(朴甲秀)는 침채가 팀채가 되고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딤채는 구개음화하여 김채가 되었으며, 다시 구개음화의 역현상이 일어나서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김치에 관련하여 종종 『시경』의 “밭두둑에 외가 열었다. 외를 깎아 저(菹)를 담그자.”는 구절이 언급되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저’는 김치의 직접적인 기원이 아니라 '원시형 채소절임'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석명(釋名)』에도 저에 관한 설명이 있다. 『석명』에 의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키면 젖산이 생성되고 이 젖산이 소금과 더불어 채소가 짓무르는 것을 막아준다.”고 하였다. 이로써 저는 채소를 젖산 발효시켜서 저장하도록 하는 젖산 발효식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 때의 『주례(周禮)』에도 순무 · 순채 · 아욱 · 미나리 · 죽순 등 일곱 가지 저를 만들고 관리하는 관청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으므로, 이러한 한나라의 저가 낙랑을 통하여 부족국가시대의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문헌상의 자료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의 식품에 관한 서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나, 우리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일본문헌을 통하여 그 시대의 식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의 『쇼쇼원문서[正倉院文書]』나 『연희식(延喜食)』 같은 문헌에 의하면 소금 · 술지게미 · 장 · 초 · 느릅나무 껍질에 절인 김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수보리지란 김치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쌀가루와 소금에다 채소를 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쌀가루로 담그는 김치는 500년경의 중국 식품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도 나와 있다. 『제민요술』에는 이밖에도 많은 종류의 김치가 설명되고 있다. 일본은 기후가 온습하기 때문에 쌀가루를 쓰는 김치가 쉽게 산패하므로 쌀가루를 쌀겨로 바꾸게 되어 일본의 대표적인 김치인 단무지가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단무지의 원조는 수수보리지라 하겠는데 다른 김치들과 달리 수수보리라는 고유명사를 붙인 것이 주목된다.

 

 

김치찌개

 

 

 

일본의 옛 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 의하면 오진왕[應仁王] 때 백제사람 수수보리가 건너와서 누룩으로 술을 빚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수수보리지는 중국에서 백제로 전해져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백제에는 수수보리지뿐만 아니라 『제민요술』의 여러 김치가 식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백제에서뿐 아니라 삼국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고려 중엽에 이규보가 지은 「가포육영」이라는 시 속에 순무를 재료로 한 김치가 우리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다. “무 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되네.” 이로써 고려시대의 김치로는 무장아찌와 무 소금절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달충(李達衷)](/Article/E0043952)의 「산촌잡영(山村雜詠)」이라는 시에서는 여뀌에다 마름을 섞어서 소금절이를 하였다는 구절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야생초로도 김치를 담갔던 것 같다.

 

고려 때의 문헌에 의한 기록은 이것뿐이지만 일본의 『쇼쇼원문서』나 『연희식』에는 채소에 조피나무열매 · 여뀌 · 양하 등의 향신료를 섞은 김치가 보이고, 원나라 때의 식품서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는 채소에 마늘이나 생강 같은 향신료를 섞은 김치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우리네 김치에도 채소와 향신료를 섞은 것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조선시대 중엽에 들어와서 고추가 수입되면서 우리나라 김치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이전의 김치는 소금물에 담그거나 천초 · 회향 등 향신료를 이용하여 담갔다. 1670년(현종 11)경의 『음식디미방』에는 동아를 절여서 담그는 소금절이 김치나 산갓을 작은 단지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붓고 뜨거운 구들에 놓아 익히는 김치가 보인다. 이것은 무염침채(無鹽沈菜) 처럼 채소 자체를 소금 없이 숙성시키는 것이다.

 

또 생치침채법(生雉沈菜法)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것은 간이 든 오이김치를 껍질을 벗겨 한치 길이만큼 가늘게 썰어 물에 우려두고, 꿩을 삶아 오이지와 같이 썰어, 따뜻한 물에 소금을 알맞게 넣어 나박김치와 같이 담가 삭혀서 먹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김치는 식물성 식품과 동물성 식품을 아울러 이용하는 데 커다란 특색이 있는데, 1600년대 말엽에 비록 고추를 쓰지 않았어도 벌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김치의 재료로서는 동아 · 오이 등의 외무리가 많고 무도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음식디미방』에는 ‘생치잔지히’ · ‘생치지히’ 등이 보이는데 이들은 오이지를 재료로 하여 꿩고기와 함께 간장기름에 볶은 것이다. 이로써 2차 재료로 쓰이는 소금절이 가공품도 역시 ‘지히(지)’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55년(효종 6)에 신속(申洬)이 엮은 『농가집성』에 「사시찬요초」라는 월령식농서가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침과저(沈瓜菹)와 침즙저(沈汁菹)가 나온다. 침즙저는 가지 · 장 · 밀기울을 섞어 뜨거운 마분(馬糞)에 묻어 20일이 지난 뒤 먹는 것으로 오늘날의 즙장이다. 즙장에 가지가 들어가니 이것은 장아찌의 일종이 되기도 하겠는데 이것을 저로 보았다.

 

1600년대 말엽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요록(要錄)』이라는 문헌에는 11종류의 김치류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김치류에도 고추를 재료로 쓰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무 · 배추 · 동아 · 고사리 · 청태  등의 김치와 무를 소금물에 담근 동치미[冬沈]가 설명되어 있다. 또 무염침재라 하여 무에 맑은 물을 넣고 4일쯤 두어서 거품이 일면 즙을 버리고 다시 맑은 물을 넣어 만드는 것도 있다.

 

그러나 오이김치인 엄황과(淹黃瓜)에서는 향신료를 쓰고 있다. 즉 오이를 뜨거운 물에 데쳐내고 건조시켜 소금 · 당 · 천초 · 회향 · 식초를 넣어서 담갔다. 이로써 당시에 고추가 전래되었으나 아직 김치에 이용되지는 못하였고 향신료로 천초나 회향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15년(숙종 41)경의 『산림경제(山林經濟)』의 김치류를 보면, 고추가 들어온 지 1백년이 지났는데도 오늘날과 같은 김치는 보이지 않고 소금에 절이고 식초에 담그거나 향신료와 섞어 만들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자(鮓)만들기 다섯을 설명하고 있다.

 

『석명』에서는 자가 저의 일종으로 소금과 쌀로써 물고기를 익혀서 먹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오늘날의 생선 식해이다. 「고사십이집」에서는 쌀 · 누룩 · 소금 · 기름 등을 써서 채소를 발효시켜 먹는 것도 자라고 하였다. 이를 『임원십육지』에서는 자채(鮓菜)라 하고 있다. 이 채소로 만드는 자는 백제의 수수보리지와 같은 것으로 조선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도 식해를 담글 때 무를 함께 섞는 일이 있다.

 

그러다가 50년이 지난 1766년(영조 42)에 나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는 김치에다 고추를 도입한 것이 보이고 있다. 침나복함저법(沈蘿葍醎菹法)을 보면 잎줄기가 달린 무에 청각채 · 호박 · 가지 등의 채소와 고추 · 천초 · 겨자 등의 향신료를 섞고 마늘즙을 듬뿍 넣어서 담그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총각김치와 같은 것이다. 또 황과담저법(黃瓜淡菹法)은 오이의 3면에 칼자리를 넣고 속에 고춧가루 · 마늘을 넣어서 삭히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오이소박이이다. 그밖에 동치미 · 배추김치 · 용인오이지 · 겨울가지김치 · 전복김치 · 굴김치 등 오늘날의 김치가 거의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김치는 중국에도 전해졌다. 1712년(숙종 38)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귀화한 노파가 그곳에서 김치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녀가 만든 동치미의 맛은 서울의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1803년(순조 3)의 『계산기정(薊山紀程)』에 의하면 “통관(通官) 집의 김치는 우리나라의 김치 만드는 법을 모방하여 맛이 꽤 좋다.”고 하였다. 『계산기정』의 김치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18세기에는 우리의 김치가 중국에 건너가서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중국의 쓰촨포채(四川泡菜)는 포채항아리에 8% 정도의 소금물을 6할 정도 되게 넣은 다음 여기에 소금물의 0.1% 정도의 천초, 3%의 고추, 3%의 술을 넣고, 따로 채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20%의 소금물에 절였다가 꺼낸 것을 항아리에 담고 약 10일간 숙성시켜 만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동치미와 비슷하다. 쓰촨지방은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중 쓰촨출신의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하므로 우리의 동치미가 쓰촨에 전하여졌다는 추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조리 · 가공법은 1872년(고종 9)경의 『임원십육지』 속에 집대성되었다. 『임원십육지』에서는 김치의 종류를 엄장채(醃藏菜) · 자채(酢菜) · 제채(虀菜) · 저채(菹菜, 沈菜)의 넷으로 크게 분류하였다. 또 엄장채란 소금 · 술지게미 · 향신료 등에 채소를 섞어 넣어 겨울을 위하여 저장하는 것이고, 자채와 저채는 같은 종류이지만 자는 소금과 쌀로써 발효시킨 것이고 저는 젓갈 · 장 · 생강 · 마늘 · 식초 등의 짜고 시고 매운 것과 잘 조화시킨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저채에 대한 설명에서는 “엄장채 · 자채 · 제채가 다같이 저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개발된 종류의 저를 특히 저채라고 한다. 이들을 구태여 구별한다면 저채는 발효시킨 뒤 그대로 먹는 것이고 엄장채는 물에 씻어서 2차 가공이나 조리 재료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저채와 제채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는 잘게 썬 것이고, 저는 채소를 통째로 발효시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채와 자채의 관계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누룩이나 곡물을 쓰는지의 여부로 구별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 김치류의 주종은 저채(침채)이고 다른 것은 부수적인 존재가 되어 있고 나아가서는 저채로써 저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임원십육지』에는 또 젓갈을 섞어주는 김치인 해저방(醢菹方), 곧 섞박지가 등장한다. 이것은 소금에 절인 잎줄기가 달린 무에 오이 · 배추 등의 다른 채소, 청각채와 같은 해초, 고추 · 생강 · 천초 · 마늘 · 겨자 등의 향신료, 조기 · 젓갈 · 전복 · 소라 · 낙지 등의 해산물, 산미완화제(酸味緩和劑)가 되는 전복껍질 등을 함께 버무려 알맞은 소금농도에서 젖산 발효시킨 것이다.

 

이로써 오늘날의 김치가 규모상으로는 거의 완성되었으며, 그 뒤는 과실 · 짐승고기 ·  등 기호에 따라 보충하는 정도의 발전이 있었고, 또 채소의 품질개량에 따른 재료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김치류의 제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증보산림경제』나 『임원십육지』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근대 및 현대의 김치 변화의 주된 요인은 김치 재료의 품종개량과 젓갈 및 조리법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속이 꽉 찬 결구형 배추가 우리 식탁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배추가 김치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계속하여 배추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1960년대까지도 서울배추, 개성배추라고 하는 반결구형의 배추를 사용하여 김치를 담그는 집이 많았었다.

반결구형 배추 중 서울배추는 조직이 단단하고 수분이 적고 저장성이 좋아 김장 김치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아직도 드물지만 김치를 담글 때 서울배추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김치 재료의 하나인 젓갈도 전에는 각 지역에서 잡히는 생선을 이용하여 각 가정에서 젓갈을 많이 담가서 김치에 넣었으나 요즈음 대도시에서는 집에서 젓갈을 담그는 일이 매우 드물게 되었고 공장에서 김치용 액젓이 생산되어 많은 가정에서 이용하고 있다.

 

김치 조리법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은 6 · 25전쟁과 도로시설과 교통수단의 발달과 매스컴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지역 사이를 왕래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아 각지방의 고유한 김치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지역을 이동하게 되었으며 그 지방에서 장기간 머물게되면서 서로 다른 지방의 김치를 먹어보고,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게 되어 다양한 조리법을 접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로시설이 좋아지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들게 되면서 물자의 유통이 빨라진데다 TV 등 매스컴의 영향으로 각 지역의 독특한 김치는 지역성을 잃은 대신 조리법이 일반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이후 김치는 세계적인 음식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2000년에는 일본 · 미국 · 영국 등 외국에 7,900만달러의 김치를 수출하였다. 또한 2001년 7월 5일에는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서 김치를 ‘국제식품’으로 공인을 하여, 앞으로 해외로의 수출 전망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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