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안 가지고 나갔다가 갑자기 비가 내려서 당황했던 경험은 아마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 같다. 아주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갑자기 비가 내릴 때 그 비가 그치거나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게 되는데, 이럴 때 쓸 수 있는 우리말 표현으로 ‘긋다’라는 동사가 있다.
보통 ‘긋다’라고 하면 ‘선을 긋다’의 뜻을 생각하지만, ‘비가 긋다’는 ‘비가 잠시 그친다’는 뜻이고, ‘비를 긋다’는 ‘비를 잠시 피하여 그치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비가 긋기를 기다렸다.’ 또는 ‘잠깐 들어오셔서 비를 그어 가시죠.’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비와 관련된 표현으로 ‘비설거지’라는 말이 있다. ‘설거지’는 원래 음식을 먹고 나서 그릇을 씻어서 정리하는 것을 뜻하지만 ‘비설거지’는 이와 전혀 관계가 없고, ‘비가 오려고 하거나 비가 올 때 비를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뜻한다. 볕이 좋을 때 시래기 같은 것을 말릴 때가 있는데, 이런 것이 비에 젖지 않도록 ‘비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비에 젖으면 안 되는 것들은 비설거지하셔서 낭패 보는 일이 없어야겠다.
또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현상’을 가리켜서 ‘비거스렁이’라고 하는데, ‘장마가 끝나니까 날씨가 비거스렁이 해서 가을 옷을 꺼내야 할 것 같다.’와 같이 쓸 수 있다.
비 오는 날 장독 덮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누구나 입을 비쭉거릴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일을 했으면서 그것을 자랑하고 유세를 떠는 사람에게 입이라도 비쭉거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의 당연한 의무를 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비 오는 날 장독 덮었군! 대단한 일을 했어"
비를 주어로 쓰면 '비가 오다, 비가 내리다, 비가 쏟아지다/퍼붓다/들이치다, 비가 그치다/멎다/긋다, 비가 개다'처럼 구성한다. 과거 어른들은 '비가 오신다'라고 비를 높여서 말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감사, 두려움이 이런 표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비가 오다'는 일반적인 어법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비를 지적하면 그 비는 '오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것으로 표현한다. '소나기가 내리다, 이슬비가 내리다, 장대비가 내리다'처럼 '내리다'를 써야 자연스러워진다. 눈이 오는 경우에도 '함박눈이 내리다, 흰 눈이 내리는 거리'처럼 '내리다'를 쓴다. '오다'는 관념적인 표현법이고, 내리다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법이기 때문에 비나 눈이 사실적으로 구체화되면 동사도 이에 호응하여 바뀌어야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라는 표현이 '언제나 한결같이'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 가능하나, '비가 내리나 눈이 내리나'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로 바뀌기 어렵다. 화살이나 총알이 많이 쏟아지는 것을 '비 오듯 하다'라고 하고, 시련을 겪은 뒤에 더 강해진다는 뜻으로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이 쓰인다. 여기서 '오다' 대신에 '내리다'를 쓰지 않는 것도 '내리다'가 구체적인 사실을 묘사하는 맛이 있어 관념의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 반면에 '오다'는 비 내리는 것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어서 다른 의미로 변화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비가 멎다/멈추다'는 내리던 비가 그쳤다는 뜻이다. '비가 개다'는 배가 멈춘 것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처럼 하늘이 맑아짐을 나타낸다. 따라서 비가 멎었다고 해서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곧 비를 맞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비가 개면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 이내 비가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를 목적어로 쓰면 '비를 뿌리다/내리다, 비를 맞다/가리다/긋다'의 문구를 사용하게 된다. 이 가운데에서 꼭 알아둘 것이 '비가 긋다'와 '비를 긋다'이다. '비가 긋다'는 비가 그치다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긋다'를 타동사로 써서 '비를 긋다'라고 하면 처마 같은 곳에 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는 말이 된다. '비를 흠뻑 맞으면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 정자 밑에라도 들어가 비를 그었다 오너라'처럼 사용한다.
의기양양(意氣揚揚)하던 사람이 갑자기 풀이 죽어 맥없는 모양을 할 때에 '비 맞은 장닭 같다'라고 하거나 '비 맞은 용대기(龍大旗) 같다'라고 한다. 우리는 비를 맞으면 사람이나 사물의 기가 꺾인다고 생각한다. 농사꾼에게는 비가 말할 수 없이 고마운 것이지만 장사꾼에게는 비가 원수가 될 수 있다.
"손은 갈수록 좋고, 비는 올수록 좋다."
라는 말을 만든 사람들은 농사꾼이고,
"소금 팔러 나섰다가 비가 온다."
라는 속담을 만든 사람은 장사꾼이다. 사람이 오래 살다 보면 무언가 되기는 되는 모양이다. 비록 신통치 않더라도 제 줏대만 잃지 않으면 뭔가가 반드시 되고 만다. 그래서
"안개 늙으니 비가 된다."
라는 속담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비와 관련된 순우리말>
가루비: 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
실비: 실처럼 가늘게, 길게 금을 그으며 내리는 비.
싸락비: 싸래기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
발비: 빗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비.
직달비: 굵고 세차게 퍼붓는 비.
달구비: 달구(땅을 다지는 데 쓰이는 쇳덩이나 둥근 나무토막)로 짓누르듯 거세게 내리는 비.
여우비: 맑은 날에 잠깐 뿌리는 비.
먼지잼: 먼지나 잠재울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비.
개부심: 장마로 홍수가 진후에 한동안 멎었다가 다시 내려 진흙을 씻어 내리는 비.
도둑비: 예기치 않게 밤에 몰래 살짝 내린 비.
꿀비: 농사짓기에 적합하게 내리는 비.
목비: 모낼 무렵에 한목 오는 비.
못비: 모를 다 낼 만큼 흡족하게 오는 비.
모다깃비: 뭇매를 치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오란비: 장마의 옛말.
건들장마: 초가을에 비가 내리다가 개고, 또 내리다가 개곤 하는 장마.
일비: 봄비, 봄에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비가 와도 일을 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
잠비: 여름비, 여름에는 바쁜 일이 없어 비가 오면 낮잠을 자기 좋다는 뜻으로 쓰는 말.
떡비: 가을비, 가을걷이가 끝나 떡을 해 먹으면서 여유 있게 쉴 수 있다는 뜻으로 쓰는 말.
술비: 겨울비, 농한기라 술을 마시면서 놀기 좋다는 뜻으로 쓰는 말.
날비: 놋날(돗자리를 칠 때 날실로 쓰는 노끈)처럼 가늘게 비끼며 내리는 비.
억수: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웃비: 비가 다 그치지는 않고, 한창 내리다가 잠시 그친 비.
해비: 한쪽에서 해가 비치면서 내리는 비.
<눈과 관련된 순 우리말>
가루눈: 가루모양으로 내리는 눈.
도둑눈: 밤사이에 사람들이 자는 사이에 모르게 내리는 눈.
묵은눈: 쌓인 눈이 오랫동안 녹지 않고 얼음처럼 단단하게 된 것.
발등눈: 발등까지 빠질 정도로 비교적 많이 내린 눈.
사태눈: 사태로 무너져 내리는 눈.
쇠눈: 쌓이고 다져져서 잘 녹지 않는 눈.
숫눈: 눈이 와서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
싸라기눈: 빗방울이 갑자기 찬바람을 만나 얼어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
자국눈: 겨울 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눈.
포슬눈: 가늘고 성기게 내리는 눈.
풋눈: 초겨울에 들어서 조금 내리는 눈.
함박눈: 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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