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거나 훈계·요청하는 말 앞뒤에서 흔히 ‘당부한다’고 한다. 그런데 ‘당부하는’ 쪽은 실제로 주문하고 당부하느라 ‘당부’란 말을 쓸 겨를이 없다. 관찰자나 제삼자가 써야 자연스러운데, 현실은 좀 다르다. 언론 쪽 논설에서는 ‘당부한다’를, 위정자나 선량들은 연설이나 조사·감사 자리에서 ‘당부드린다’를 즐겨 쓴다.
본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의를 주거나 잊지 않도록 거듭 강조하는 걸 일컬어 ‘당부한다’고 한다. ‘당부드린다’는 ‘당부한다’가 좀 불손하게 느껴져 쓰는 말이지만, 권위와 공손이 어울리지 않아 서로 충돌하고 버성긴다. ‘부탁·상의·공양·인사·말씀+드리다’라면 그나마 어울리는 조합이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강력한 의지를 보여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억울하게 배제되는 그런 비정규직이 없도록 확실하게 관심을 보여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서면으로 좀 해 주시도록 당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당부드립니다’는 상투적이고 하나 마나 하며 버성기게 들리므로 그냥 ‘보여주십시오’, ‘~주시기 바랍니다’ 정도로 바꾸는 게 낫겠다.
“국방부 차원에서 총체적인 안전점검을 실시할 것을 당부한다."
"우리는 이번 청와대 수석비서들의 일괄사표가 국정쇄신의 출발점이 되길 당부한다"
"다시 한번 당부하건대 ….”
권위적이고 낯익은 논설투다. 그러나 참된 ‘권위’는 이런 훈계조의 말투보다 언론 구실을 제대로 하는 데서 나올 터이다.
누구에게 무엇을 청하는 것을 부탁이라고 하고, 누구에게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을 당부라고 한다. 청하는 것도 대체로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부탁은 일반 명사를 폭넓게 목적어로 쓸 수 있지만 당부는 동작이 들어 있는 명사만을 목적어로 삼을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공무원이 선물을 부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행을 가면서 자기 집을 나에게 부탁했다."
"그는 친구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죽었다."
같은 경우에 '선물, 집, 아들' 같은 것은 행위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부탁하다'는 이런 것을 목적어로 삼을 수 있으나, '당부하다'는 이런 것을 직접 목적어로 삼을 수 없다.
"여행을 가면서 나에게 자기 집을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친구에게 아들을 돌봐 달라고 당부하고 죽었다."
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부탁은 받을 수 있으나, 당부는 받기보다는 듣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부탁'은 말로도 글로도 할 수 있으나, '당부'는 주로 말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부탁'은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 있지만 '당부'는 거절할 수 없다. 당부한 것은 일단 들은 다음에 그것을 실천하거나 하지 않으면 된다. '부탁'은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지만, 당부는 안 지켜도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은 아니다. 당부대로 하지 않으면 지시나 뜻에 따르지 않은 것이 된다.
"그가 취직을 부탁하였지만 거절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그의 취직 부탁을 들어주라고 당부하셨으나, 그렇게 해 드리지 못했다'처럼 써야 한다. 부탁은 청(요청)에 가깝고, 당부는 지시에 가깝다. 그래서 부탁은 아쉬운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보통이고, 당부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선물을 꼭 사 오라고 부탁하는 것이지 당부한다고 할 수는 없다. 선생님께 주례를 서 줄 것을 부탁해야지 당부하면 안 된다. 아내가 남편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 당부할 수도 있다. 아내가 부탁하는 경우에는 남편이 일찍 들어와서 일을 해야 하니 그렇게 부탁하는 것이고, 당부하는 경우에는 남편이 밤늦게 다니다가 변을 당할지 모르니 걱정스러워 당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탁과 당부는 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가 같지 않고, 때로는 주체와 객체의 상하 관계에 따라서 달리 쓰이기도 한다.
'부탁'은 주체가 객체에게 어떤 행위를 해 달라고 요청하고, 그 행위가 주체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에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 내용이 주체에게는 별로 이익이 되지 않지만 객체에게 큰 이익이 되는 경우에는 '부탁하다'를 쓰지 않고 '당부하다'를 쓴다. 태풍이 불고 있으니 야영객은 개울에서 나와 대피하라고 당부해야지, 부탁하면 안 된다. 일교차가 심하니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당부해야지, 부탁하면 안 된다. 이 경우에도 윗사람에게는 '당부'보다는 '부탁'을 써야 한다.
"대통령이 국가를 바로 경영해 줄 것을 국민들이 당부했다."
라고 하기보다는 부탁했다를 쓰는 것이 격에 어울린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도 윗사람에게는 당부하기 어렵도 부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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