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택 동계 아시안 게임 때부터 유행을 타기 시작했던 겨울철 최애템(최고 사랑하는 아이템)은 바로 롱 페딩이다. 밖에서 활동하는 운동선수나 영화 촬영 제작진이 주로 입는 두툼한 방한용 옷을 너나없이 유니폼처럼 걸치고 그야말로 누비고 다닌다. 검은색의 부하고 뚱뚱해 보이고 투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옷에 열광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방한(防寒)을 위한 실용에서인지, 아니면 멋을 위한 유행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제법 두 가지 다를 만족하는 옷이 바로 롱 패딩일 듯 싶다. 유행에 눈이 이미 현혹되어서인지 따숩고 이미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패딩을 우리말로 옮기면 누비옷이 될 듯 하다. 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이나 털을 넣는다는 점과 누빈다는 점에서 누비옷과 공통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복식사(服飾史)에서 누비옷의 전통은 매우 깊다. 누비옷이라는 말이 이미 15세기 문헌에도 등장한다.
누비옷은 원래 누비라고 했는데, 누비 또한 이미 15세기 문헌에 보인다. 누비가 옷의 일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누비'에 잉여적 성격의 옷을 덧붙여 누비옷이라 한 것이다. 이는 갑옷을 뜻하는 갑에 옷을 덧붙여 갑옷이라 한 것과 동일한 구조이다.
이쯤해서 그럼 도대체 누비의 어원은 무엇일까? 19세기 문헌인 <명물기략>(1870)에서는 누비를 한자어 '납비(衲緋)'로 보았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자부회다. 이보다 앞서 정약용(1762~1836)은 <아언각비>(1819)에서 누비를 중국어 '납의(衲衣 낡은 헝겊을 모아 기워 만든 승려의 옷)'에서온 말로 보았다. 국어학자 이희승(1897~1989) 선생도 그렇게 분석했다. 중국어 납의(衲衣) 설은 좀 더 신중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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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가 "비구(比丘) ㅣ 누비 닙고 석장(錫杖) 디퍼 죽림국(竹林國) 디나아(비구가 누비 입고 석장 짚어 죽림국을 지나)"<월인석보> 1459에서 보듯 중세국어에서 '비구(比丘 남자 중)'와 함께 쓰이기도 하고, 누비와 즁이 어울린 누비즁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보면, 이것이 승려와 관련된 중국어 납의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누비'는 5세기 이전에 중국어 납의에 대한 상고음을 받아들인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누비에 대한 동사 누비다(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죽죽지게 박다)가 있는 것을 근거로, 누비를 중국어 납의 차용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곧 누비를 고유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어 납의를 누비로 차용한 뒤에 이를 통해 동사 누비다를 만들었다고 설명하면 중국어 차용설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누비가 중국어 차용어인지, 아니면 고유어인지는 좀 더 살펴야 할 듯 하다.
동사 누비다에는 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죽죽 지게 박다라는 의미 이외에 이리저리 거리낌 없이 다니다, 이마 따위를 찡 그리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들은 '이리저리 줄을 죽죽 지게 받는 행위'에 기반하여 파생된 의미로 보인다.
한편, 누비는 옷감의 보강과 보온을 위해 옷감의 겉감과 안감사이에 솜, 털, 닥종이 등을 넣거나 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안팎을 줄지어 규칙적으로 홈질하여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누비는 면화재배 이후 적극적으로 활성화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다양한 실물자료들이 전해지고 있다. 승려들이 일상복으로 입는 납의(衲衣)는 헤진 옷을 수십 년 동안 기워 입은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점차 누비기법으로 발전하여 방한과 내구성, 실용성 등이 뛰어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누비는 누비 간격이나 바느질 땀수에 따라 세누비·잔누비·중누비 등으로 나뉘며, 형태에 따라 오목누비·볼록누비·납작누비로 크게 구분된다. 누비 간격은 잔누비 0.3㎝, 세누비 0.5㎝, 중누비 1.0㎝ 이상으로 구분된다. 세누비·잔누비 중에서도 옷감 2겹만을 누벼주어 겉모양이 오목오목하면 오목누비라 하고, 솜을 여유있게 두고 누벼주어 겉모양이 볼록한 입체적인 효과를 나타내면 볼록누비라 한다. 또 얇은 솜을 두거나 닥종이를 이용하기도 하고 옷감만으로 누벼주어 평면적이면 납작누비라 구분하였다. 누비용구로는 옷감재질과 동일한 실, 누비 두께에 따른 다양한 바늘 종류, 가위, 인두, 밀대, 자, 골무 등이 있다. 누비 바느질 기법은 홈질이 대부분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박음질도 사용된다. 의복이나 침구류에는 규칙적인 직선누비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주머니나 보자기류에는 누비 자체를 문양으로 살려 곡선과 직선으로 조화를 이룬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손누비는 세계 유일한 재봉법으로 그 정교함과 작품성이 자수를 능가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나, 지금에 와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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