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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셈 치다의 어원 : 새 문명의 모델

by 61녹산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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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는 셈치고 이번 한번만 넘어갑시다.
속는 셈치고 이번 한번만 넘어갑시다.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셈치고'라고 말한다. 그래서 도둑맞은 셈치고, 술 마신 셈치고, 속은 셈치고 개쩍은 돈을 쓰기도 한다. 께름직하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큰 손해를 보거나 화를 입은 셈치고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서도 일부러 사용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도 근본적으로는 모든 것을 죽은 셈치고 생각하는 삶의 계산법이다. 죽음 셈치면 어떤 불행한 일도 다행으로 보인다. 교통 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없어져도 죽은 셈치면 눈물을 닦을 수 있다. 

 

자기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무엇인가 부탁할 일이 있어도 '~셈치고'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셈을 한자로 굳이 표현하면 계산(計算) 정도가 될 듯 하다. 어느 사회에서든 계산은 숫자를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이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다. 숫자에는 쌀쌀하고 칼로 무 자르듯 냉정하기까지 하다. '~한 셈치고'라는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계산하는 법을 생각해 냈을 것으로 보인다. 부자지간에도 부부지간에도 셈은 바르게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셈은 거꾸로 냉엄한 그 계산의 세계를 얼버무리는 데 그 특성이 있다. 고차원적이라고나 할까? 암튼 수학을 참 어려워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수학과 같은 저급한 학문을 가지고 그리 골머리를 썩이니 안스럽다고 하면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어든다. 그러면 이리 설명해 준다. 수학, 산수에서는 1 + 1 는 반드시 2가 정답으로 나와야 한다. 하지만 국어는 언어는 1 + 1 이 나한테는 4가 된다. 왜냐하면 나와 마누라가 만나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놓았으니 4가 된다고 이야기를 덧붙이면 금방 수긍한다. 역시 언어는 고급학문임을 아이도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 셈이다' 하는 것은 '그렇다'의 단정과는 사뭇 다르다. 대충, 얼추, 근사하다는 것으로 약간의 그 뜻을, 뒤를 흐릴 때 우리는 셈이라고 쓰게 된다. 셈은 오히려 애매하거나 융통성을 뜻하는 말로 쓰일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컴퓨터를 우리말로 셈틀이라고 하자고 하는 사람이 많을 듯 하지만 우리말의 셈이 서구적인 계산과는 완전히 다르기에 셈틀과 컴퓨터와는 그 개념이 상충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마 뉴로 컴퓨터가 나와서 애매한 것까지 알아서 척척 처리하는 제5세대 쯤 되는 컴퓨터가 등장해야 셈틀이라고 겨우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계이 어느 나라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후하고 푸짐하기까지 한 속담은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성보다 주관적인 기분을 중시하는 '셈치는' 사회에서나 일어남직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셈치고는 한국인의 불합리한 말에 한숨을 쉬다가도 지나치게 합리성과 정확성만을 추구하는 현대 문명의 냉정한 풍경을 보면 굳이 더 퍼서 올려도 흘러내릴 것을 알면서도 여러번 몇 번씩이나 쌀을 고봉으로 퍼 올리는 한국인의 손길이 더 따뜻하고 정겨워 보이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길을 묻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골길을 가다가 길을 물으면 어디에서고 십 리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전통적인 한국 사람들은 객관적인 길의 실제 거리보다도 묻는 사람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 안 남았다고 해야 보다 힘을 내고 내처 발걸음을 내어디딜 것이기에 일부러 "다 왔어요"라고 말했던 경험이 떠오른다. 얼마 안 남았다고 해야 힘을 내고 걷을 수 있기에 아직 한참 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어 일부러 김을 뺄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갈 길인데 한참 가야 한다고 하나 다 왔다고 하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분이라도 좋은 것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당연한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덜떨어진 서양문명 맹신자들이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옛날 희랍의 현자 얘기는 이와는 아주 딴판이다. 해가 저물 때까지 아테네의 시내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길가에서 양을 치고 있던 노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화를 내고 나그네가 기을 다시 걸어가자 그 노인은 그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는 그 정도 걸음걸이라면 해지기 전에 들어갈 수 있겠다고 가르쳐준다. 애매한 것을 싫어하고 정확한 것을 추구하는 서구적인 합리성이 작은 한 편의 에피소드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다. 개인에 따라 사람의 걸음걸이는 다 다르기 마련이다.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모르고는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애매한 경우에는 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서구의 합리주의며 서구의 현자 행동 방식이다. 

 

그러고 보면 '좋은 게 좋다'는 그 기묘한 한국식 표현도 '셈치고'라는 말고 친척일 듯하다. 좋은 것이면 그만이지 그거 꼬치꼬치 원인을 캐고 원칙을 따져서 나쁘게 만들 것이 없다는 일종의 반합리주의 선언인 '셈'이다. 애매한 채로 남겨두기, 그냥 덮어두기의 그 셈치고의 문화는 분명히 근대 문명에 반하는 사고이다. 그러므로 근대화 산업화의 한 세기 동안 우리는 합리주의 계산법을 익히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고 이제 남부럽지 않게 계산에 밝은 민족으로 변화했음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세상엔 저울로만 달 수 없는 삶도 있다는 사실도 체험해야 한다. 1초의 오차도 1밀리의 여유도 없이 무작정 합리성과 정확성만을 추구하다가 삶이 원했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 정신줄을 놓게 되는 것이 바로 서구 사회의 정신병이라는 것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음성상징어가 유난히 발다한 한국인답게 살짝 도는 것을 그리고 순간적으로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 5백 년 셈만 치고 살아가다가 이제는 모두 뿅 가버린 한국인의 모습을 보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른바 선진국일수록 스트레스와 노이로제 그리고 정신 질환에 걸린 환자 수는 높다. 자살률도 전세계에서 1위라고 하니 말 다하지 않았나 싶다. 이에 '셈문화'는 비합리주의도 반합리주의도 아닌 초합리주의 즉,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또 다른 새 문명의 패러다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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