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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마찬가지의 어원

by 61녹산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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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의 어원
마찬가지의 어원

 

마찬가지라는 말은 사실은 같은 것이 아닌데도 비슷한 상황, 분위기, 입장에서 비슷한 것이라고 슬쩍 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상황이 애매할 때, 우리는 '마찬가지'라는 말을 곧잘 쓴다. 좋은 경우이든 나쁜 경우이든 자주 쓰는 말이다. 안 먹고서도 먹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고 지고서도 이긴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기도 한다. 마치 요즘 "심리적으로"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보고서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경우까지 있다. 특히 바둑용어로 사용하는 미생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라는 말의 어원을 탐구해보면 '마치 한 가지라'는 말이 줄어 된 말이라는 것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잎사귀는 제각기 달라도 그것이 달려 있는 가지는 똑같은 가지이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라는 말에는 겉보기는 달라도 그 근본을 따지면 마치 한 가지와도 같다는 오묘한 진리가 들어 있는 경우가 된다. 

 

무엇이 같다고 할 때 '한가지'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가지' 의식, 말하자면 한가지 의식처럼 한국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드물다. 비슷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보다는 우리를 중시하는 것과 조금은 닮았다고 할까? 암튼 우리 민족 고유의 특성, 품성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신라시대의 노래인 향가, 그 중에서도 최고작을 꼽으라면 월명사의 <제망매가>, 그 유명한 시구에도 이 한가지의 쓰임이 돋보인다. 월명 스님은 자기 여동생을 잃은 그 슬픔을 향가로 겨우 달래며 여동생의 명복을 빌고 있다. 

 

어느 가을날 이른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질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 모르는구나.

 

한 핏줄, 혈육지간을, 오누이 관계를 한 가지로 나타내고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여동생을 이른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비유한 아름다운 시가가 바로 그 유명한 월명사의 10구체 향가 제망매가이다. 특히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한 가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떨어질 때에는 제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뿔뿔이 흩어져가는 존재의 외로움이 그리도 가슴 시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뭇잎은 그 외로움을 잊기 위해 가지를 찾고 줄기와 뿌리를 찾고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 존재의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월명사는 그 외로움을 생명의 한가지 의식으로 넘으려고 한 듯 하다. 그래서 월명 스님이 밤길을 걸으며 피리를 불면, 가던 달이 멈춰 그 피리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땅에 있는 사람과 하늘에 있는 달(자연)이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말에 가지 계통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아기라고 부ㅡ는 말부터가 어머니에서 갈라진 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즉 가지가 아지가 되고 아지가 아기로 변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가지>아지>아기). 좀 더 살펴보면 강아지는 개 가지이고 망아지는 말 가지이고 송아지는 소 가지가 된다. 심지어 돼지란 말까지도 돗(돼지의 옛말) 아지에서 온 말이다. 그 뜻대로 하면 돼지는 돼지 새끼란 뜻이고 원래 큰 어미 돼지는 도 개 걸 윷 모 할 때의 그 도(돗)이다.

 

대학가에서도 공동체 의식이니 동아리니 하는 말을 많이 쓴다. 그것을 한가지라는 말로 고쳐 쓰면 그보다 몇 배나 아름답고깊은 뜻을 지닌 '한가지'라는 토박이말이 된다. 나뭇잎은 서로 달라도 그 가지는 한 가지이다. 그래서 그 가지가 꺾이면 나뭇잎 하나하나가 다 같이 시들어 떨어지고 만다. 겉으로 보면 분명히 다른 것인데도 그 뜻이나 모양을 좀더 깊게 들여다보면 '마치 한 가지'와 다름없는 것들이 우리 삶 속에 참으로 많다. 하나하나의 나뭇잎 사이에 가려져 있는 한 가지를 찾아내는 마음과 그 시선이 바로 대한민국을 지켜오고, 한국인을 한 동족으로 이어온 이념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달라 거의 민족의 동질성을 잃고 살아가는 북한의 경우에도 이 가지 의식은 한 가지이다. 김정일이 계모인 김성애가 낳은 이복 김평일을 곁가지라고 부른다는 보도를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가지 의식은 뿌리와 나뭇잎의 한가운데 있는 존재라는데 문제가 있다. 가지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나무 등걸이 나타나고 거기에서 또 들어가면 뿌리가 드러난다. 미국 내 흑인들의 민족적 공동체의 근원을 파 들어간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제목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뿌리'였다. 근본이라는 한자 말 역시 뿌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근본의 근(根)이 뿌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본(本)이라는 한자 역시 나무 뿌리를 뜻하는 글자이다. 나무 목자 위에 선을 그으면 이파리가 아직 나오지 않은 나무의 마들가리 부분을 뜻하는 미(未) 자가 되고 반대로 그것을 아래 부분에 그으면 뿌리 부분을 나타낸 본(本) 자가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뿌리만을 강조하면 이 세상에 다른 것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같기 때문에 차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뿌리로 치면 우리는 단군의 한 자손으로 성도 이름도 가족 혹은 친척도 무의미해진다. 뿌리의 뿌리 쪽으로 더 올라가면 원숭이가, 그리고 30억 년쯤의 뿌리로 내려가면 우리는 귀도 눈도 없는 아메바와 마찬가지, '마찬뿌리'가 된다. 

 

사람은 너무 뿌리 쪽으로 가도 현실성이 없고 너무 이파리 쪽으로 가도 허전해서 못 산다. 동질성과 이질성의 그 사이에 바로 가지가 있다. 무수한 가지가 있다. 다양성, 그러면서도 하나하나의 나뭇잎을 꼭 끌어안고 있는 튼튼한 끈으로 된 이 한 가지 의식이 때로는 배타성이나 폐쇄성을 갖는다고도 했지만 살짝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정 많은 한국인들을 만들어낸 문화의 원천이기도 하다. 뿌리와 잎의 중간에 위치한 한국인의 균형 감각도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 모르는' 그 외로운 이파리들만이 모여 사는 것이 서구의 개인주의 사회일 것이다. 이파리 없이 뿌리에 친친 감겨 살아가는 것은 일본의 집단주의 사회이다. 이파리도 뿌리도 새 문명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이파리의 개인도 뿌리의 집단도 아닌 그 한 가운데의 가지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른바 네트워크 정보화 사회이다. 분명 마찬가지라는 말 속에는 갈등과 경쟁, 차별화와 소외로 핏발이 서려 있는 근대인의 그 시선과 다른 눈빛이 있을 것이다. 답답하고 괴롭고 외로움을 느낄 때 '마찬가지야'라고 한번 크게 말해보자. 그리고 또 작은 소리로 '마치 한 가지야'라고 그 말의 메아리를 울리게 해보자. 자전거를 타고 갈 때의 그 평형감, 안정감, 그것이 바로 마찬가지이고 한 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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