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아들에게 손자 걱정을 하면서
"얘, 영수도 외국 물을 좀 먹어야 되지 않겠냐?"
라고 하니 옆에서 그 말을 듣던 영수
"할머니, 알래스카 물 먹어 보았는데 국산과 별로 차이가 없어요."
라고 한다. 할머니가 생각하는 외국 물과 영수가 생각한 외국산 물이 서로 달랐던 셈이다. 물의 용법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루에 몇 잔 또는 수십 잔의 물을 마신다. 물은 액체이기 때문에 마신다고 하는 것이 옳지만 대개 먹는다고 한다. '마신다'가 전문 영역이라면 '먹다'는 일반 영역인데 전문 영역의 낱말을 잘 쓰지 않는 것은 퍽 아쉬운 일이다. 물을 마시되 매우 빠르게 마시는 것을 '켠다'고 한다. 목마른 사람이 단숨에 물 한 잔을 마실 때에 '물을 켠다' 또는 '물을 들이켠다'고 해야 그 사람의 물 마시는 성격이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샘이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은 이처럼 마시는 데 쓰이지만, 강이나 내에서는 '물을 건너'거나, '물을 헤'거나, '물에 빠질' 수도 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입으로 물이 들어가는 것을 '물 먹었다'고 하지 물 마셨다고 하지는 않는다. '물을 마시다'는 자기의 의사에 따라서 품위를 유지하면서 물을 입 안으로 넣어 목구멍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라면, '물을 먹다'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물을 마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 이번 시험에서 물먹었어."
는 예상외로 형편없는 결과를 받았음을 의미하고,
"우리 그 자식 물먹이자."
는 골탕을 먹이자는 뜻으로 사용된다.
'물을 따르다'는 그릇에 있는 물을 조금씩 조심스럽게 흘러내리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대체로 큰 그릇에 있는 물을 작은 그릇으로 조금 떨어뜨리는 행위나,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을 그릇에서 조금 흘려보내는 행위에 쓰인다. 이에 비해서 '물을 붓다'는 필요한 그릇(대체로 아가리가 큰 그릇)에 한꺼번에 물을 쏟아 넣는 행위에 쓰인다. 이것을 좀 강하게 표현하면 '물을 퍼붓다'가 된다. 솥에 물을 부어야 하고, 잔에는 물을 따라야 한다. 잔에 술을 붓는다고 하면 조심성이 없이 또는 성의 없이 술을 따르는 행위가 된다. 사람이나 음식 위에 물을 뿌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물을 끼얹다'고 한다. 사람에게 물을 끼얹는 것은 화풀이에 해당하고, 음식 위에 물을 끼얹는 것은 대개 밥이 될 것 같아서 물을 조금 넣거나, 시루떡을 할 때에 물을 고루 뿌리는 것을 나타낸다.
물을 부어야 할 곳에 붓지 않고 실수로 물을 떨어뜨리면 '물을 쏟았다'고 한다.
"방바닥에 물을 쏟았다."
라고 하면 잘못해서 그릇을 기울이는 바람에 물이 바닥에 한꺼번에 떨어졌다는 말이 된다. 그릇이 기울어지지 않고 잔을 조금씩 넘쳐서 물이 줄곧 떨어지면 '물을 흘린다'고 하지 '물을 쏟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엎지른 물' 또는 '엎질러진 물'이라고 하면 '바로잡을 수 없거나 돌이킬 수 없게 된 일'을 가리킨다.
바다에는 바닷물이 시간에 따라서 붇거나 빠지거나 한다. 밀물이 지면 물이 들어와 불어나는데 이때 물의 높이가 높아지므로 '물이 오른다'고 한다. 반면에 썰물 때가 되면 물이 나가면서 빠지게 되는데 이때는 '물이 내린다'고 한다. 밀물은 '물이 밀'면서 들어오는 것이고, 썰물은 '물이 써'면서 나가는 것이다.
물은 나무에도 오른다. 봄이 되면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하면 나무도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맨 먼저 하는 것이 대지에서 물을 빨아들여 가지로 보내는 일이다. 그래서 나무에 물이 오르면 나무에 생기가 돌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물이 오를 수 있다. 무슨 일이 손에 익어 능숙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물이 오른 시점이다.
"아무개의 연기는 이제 물이 올랐어."
라고 하면 성숙한 연기를 의미한다. '물 오른 처녀'라면 여자로서 성숙미가 넘치는 처녀가 된다. '물이 오르다'를 '물오르다'로 쓰는 경우가 있음에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어떤 곳을 지나다 보면 사람들이
"물 좋은 곳에서 한번 놀고 가세요."
라고 속삭인다. 친구가 강남 어디로 발령을 받아 가니 주위에서
"물 좋은 곳으로 가게 되어 좋겠다."
라고 말한다. 아내가
"시장에 가니 물 좋은 생선이 많이 있었다."
라고 말한다. '물이 좋다'는 여러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싱싱함, 아름다움, 돈 등이 넘치는 곳은 모두 물이 좋은 곳이 되는 것 같다.
물은 많은 생명체에 들어가 그 생명체를 유지하는 바탕이 되어 준다. 그런데 물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있다. 기름이라는 액체는 물과 같은 액체이면서 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물에 섞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물과 기름' 또는 '물 위의 기름'이라고 하면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물은 불을 끄는 데 쓰인다. 그래서 물과 불은 상극이라고 한다. '물과 불의 관계'라면 서로 용납할 수 없어 맞서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인지 불인지 모른다'는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마구 행동함을 의미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는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함을 의미한다.
냄비에 물을 넣고 끊이면 그 끓는 소리가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다. 그래서 '물 끓듯 한다'고 하면 여러 사람이 몹시 술렁거린다는 말이고, '물 뿌린 듯하다'거나 '물을 끼얹은 듯하다'고 하면 물이 소란스럽게 끓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듯이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지거나 숙연해지는 모습을 나타낸다. 밥 짓는 데 필요한 만큼의 물을 솥에 붓는 것을 '물을 잡는다'고 한다. 논이나 못자리에 물을 넣는 것도 '물을 잡는다'고 한다. '물이 잡히다'는 대체로 물집이 생긴 경우에 쓰인다. 낫질을 오래 하거나 오래 걸으면 손과 발에 물이 잡힌다. 즉 물집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물집이 생기면 바늘에 콧김을 쐰 다음에 바늘 끝으로 조심스럽게 물집을 터뜨리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물집을 터뜨린 뒤에 그 부위에 소독을 하지 않으면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물을 사서 마시지만 과거에는 물이란 거저 어디에서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물 쓰듯 하다'가 돈이나 물건을 헤프게 쓴다는 말을 뜻했다. 앞으로도 이런 말이 쓰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물은 제 곬으로 흐른다.
라는 말이 있다. 참 멋진 말이다. 물이 스스로 제 길을 찾아 흐르게 되는 것이 자연 이치이듯이, 모든 것이 사리에 맞게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을 중국 사람들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였다.
물고기는 물을 만나면 '물 만난 고기'가 되고, 생쥐는 물에 빠지면 '물에 빠진 생쥐'가 된다. 물고기가 물 밖에 있다면 '물 밖에 난 고기' 신세가 될 것이고, '물 본 기러기, 꽃 본 나비'는 무척 흐믓하고 행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맞이꾼'이라는 말은 여자가 맞을 수 있는 것에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 다섯 가지를 한꺼번에 맞게 되는 여자를 가리켜 오맞이꾼이라고 한다. 그 다섯 가지 가운데 첫째가 '물을 맞는' 것이다.
개성 박연폭포로
물을 맞으러 갔다가,
난데없이 비를 맞고,
옷에 넣은 돈을 도둑맞고,
엉큼한 녀석을 만나 서방 맞고,
집에 돌아와 흠씬 매 맞고,
다섯 가지가 이렇게 척척 맞을 수가 있다니 참 재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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