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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얼의 어원자료_쓸개가 빠지면 얼빠진 사람이 된다

by 61녹산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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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교육헌장

 

 

 

겨레의 얼, 나라의 얼 등에 보이는 ‘얼’이 ‘정신’ 또는 ‘혼’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옛말에서는 ‘얼’이 ‘정신ㆍ혼’으로 쓰인 예가 없다. 정신이나 혼의 뜻으로 쓰인 말은 ‘넋’이 있을 뿐이다.  얼이 혼이나 정신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舊韓末)에 보이기 시작한다.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쓰신 <조선민족 5천 년의 얼>이라는 제목의 논문에 처음 쓰이지 않았나 한다. 

 

 ‘얼’이 옛말에서는 명사로 쓰인 예가 없다. ‘얼’은 옛말에서 ‘어리다’ 즉 ‘어리석다ㆍ홀리다’의 뜻을 지니는 어간인 것이다. 옛말에서 ‘얼빠지다’는 갈피를 못 잡다의 뜻이지 얼, 즉 정신이나 혼이 빠졌다(拔)의 뜻은 아닌 것이다. 얼간, 얼치기와 같이 얼은 어리석다의 뜻을 지니는 말이다. 

 

 ‘얼’의 경우는 어느 한 사람이 잘못 알고 쓴 말을 언중(言衆)들이 그대로 따라 공인을 받은 말이라 하겠다. ‘얼’이라고 하는 말은 이미 정신ㆍ혼의 뜻을 지니는 말로써 공인을 받은 말이라 하겠고, 아무 저항감 없이 쓰이고 있는 말이라 하겠다.

 

경쟁만을 강요하는 교육 환경에서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가운데, 교육 문제의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성교육’이다. 인성교육하면 대부분 도덕 교육이나 예절 교육을 생각한다. 그러나 인성교육은 ‘인간성(人間性)’ 즉, 인간다운 성품을 길러내는 모든 일들을 말한다. 

인성교육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우리 생활 속에서 이루어졌다. 어른을 공경하는 가족 문화, 서로 돕고 협력하는 공동체 문화, 우리말과 우리글 속에 ‘인성’은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다. 특히 우리말을 돌아보면, 선조들이 자녀들을 가르쳤던 교육의 지혜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말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일까. ‘좋다’는 말에는 ‘조화롭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조화롭다’는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우러진다는 뜻이다. 반대로 주변과 조화롭지 못한 것, 자신의 이기심에 치우쳐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분명 나쁜 것이다.

 

이기적인 나에 갇혀 살아가는 나뿐인 사람들의 얼굴은 어둡다. 그러나 좋은 사람, 조화로운 사람의 얼굴은 밝고 환하다. 얼굴에는 그 사람이 지닌 기운이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은 명예나 양심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얼굴을 못 들겠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그러한 의미이다.

 

 

얼굴

 

 

 

얼굴은 ‘얼’과 ‘굴’로 이뤄진 순우리말이다. 은 정신의 핵을 말하고 은 구멍 또는 골짜기를 뜻한다. 따라서 얼굴이란 얼이 깃든 골 또는 얼이 드나드는 굴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을 거슬러 오르면 우리 정신의 뿌리를 만날 수 있다. 그 뿌리가 바로 얼이다. 어린이, 어른, 어르신이란 말도 모두 ‘얼’에서 비롯되었다. 어린이는 얼이 아직 여린 사람, ‘어른’은 얼이 익은 사람. ‘어르신’은 얼이 완숙하여 얼이 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얼이 익어가는 과정을 잘 묘사한 우리말이다. 그래서 어른이란 실한 열매처럼, 그 사회에서 결실을 맺을 자격과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이것이 어른의 기준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른이 되어서도 철이 덜 든 어른 아이가 너무나 많다. 기본적으로 사람간의 도리를 지키고 예의를 갖추는 ‘인성’이 결여되어 있다. 경쟁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서 기본적인 인성을 중심으로 한 가치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바라볼까? 나만 알고 자라난 아이는 나쁜 사람이 되고, 결국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남을 짓밟고 해하는 일들을 저지른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 이런 것을 알 때, 아이들은 사람의 참가치를 깨닫고 삶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의 참 가치에 대에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가르쳤을까. 우리말의 기원을 찾아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민족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예가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쓰는 ‘반갑습니다’ 라는 인사말이다. 반의 어원은 ‘한’과 관련된 음가로 이는 곧 ‘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반갑다’는 ‘반과 같다’ 즉 ‘당신은 신과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것은 ‘당신은 하늘의 신과 같이 크고 밝은 존재입니다’ 라는 찬사를 보내는 셈이다. 사람을 만날 때 이런 마음을 담아 인사를 나누면, 금세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말의 인격이 높아짐에 따라 서로의 인격이 높아지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을 하늘처럼 높고 귀하게 여기는 문화가 우리말 속에 깃들어 있다.  ‘고맙습니다’도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고맙다’의 뿌리가 되는 글자인 ‘고’는 높은 산을 가리킨다. ‘고’에 여성을 뜻하는 ‘마’가 붙으면서 ‘고마’는 여신, 풍요를 상징하는 땅의 신(지모신)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서로 먹을거리를 나눈다거나 도움을 받으면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는데, 이는 ‘고마와 같습니다’  ‘당신은 신과 같은 사람입니다’ 라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말의 중요한 핵심은 인간의 정체성을 ‘신’으로 본다는 점이다. 사람을 하늘로 보고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깃들어 있다는 천지인(天地人) 정신, 이것이 우리 선조들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인성교육의 핵심이었다.

 

남와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교육, 사람을 신과 같이 여기는 교육, 얼을 키워 어르신으로 성장하는 교육, 이것이 우리말 속에 깃든 선조들의 가르침이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자라난 얼이 큰 사람은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홍익인간이 된다. 홍익인간이 바로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 조화로운 세상, 바로 이화세계(理化世界)이다. 우리나라 교육기본법에도 교육의 목적을 ‘홍익인간 양성’이라고 밝혀 놓았다.

 

얼빠진 교육이 아니라 얼을 살리는 교육이 회복된다면, 우리 아이들의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첫 번째가 우리말 속에 깃든 보석과 같은 가르침을 다시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말을 통해 우리의 위대한 정신문화를 어려서부터 가르쳐준다면, 우리 아이들은 다시 밝고 환한 얼굴을 되찾을 것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아비자할 때다."

 

이는 1968년 반포(세상에 널리 알리다)된 '국민교육헌장'의 도입부다. 초등학생 시절 이 헌장을 억지로 외운 덕에 얼이란 다소 무거운 단어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당시 얼이란 말이 어린 마음에도 묵직한 울림을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얼에 대해 일찍이 국어학자 양주동(1903~1977) 선생은 '어리석음'을 뜻하는 '얼'에서 온 것으로 설명했다. 동사 '얼빠지다'를 우연히 넋 빠지다라는 구와 대비함에 따라 어리석음을 뜻하는 얼이 넋, 곧 혼의 의미를 띠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설은 무엇보다 얼빠지다의 얼이 어리석음을 뜻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하나,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얼에 대한 이러한 어원설은 상당 기간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한때 이러한 설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양주동 선생의 글을 재차 읽다가 어원에 대한 안목이 조금씩 틔여감에 따라 '얼빠지다'의 얼이 어리석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옛 문헌에서 얼빠지다는 이전 어형인 열빠지다를 찾은 후로는 더욱 그러한 의심이 좀 더 합리적인 비판으로 굳혔다. 

 

열빠지다 는 열이 빠지다라는 구에서 온 단어다. 여기에서 열은 놀랍게도 육부(六腑)의 하나인 쓸개를 가리킨다. 현재 열은 쓸개에 밀려나 강원, 평안 등의 일부 지역에서나 쓰이고 있다. 이런 지역에서는 웅담(熊膽)을 곰쓸개가 아닌 곰열이라 한다. 열이 쓸개를 뜻하므로 열이 빠지다의 표면적 의미는 쓸개가 빠지다가 된다. 그러나 속뜻은 이와 크게 다르다.

 

동양 철학이나 의학에서는 쓸개를 정신, 주체, 용기 등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인식핝다. 줏대 없는 사람을 쓸개 빠진 사람이라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열이 빠지다에 정신이 빠지다, 줏대가 없다와 같은 비유적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 그 표면적 의미와는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다. 열이 빠지다가 비유적 의미를 띠게 되자 여기에 쓰인 열 또한 자연스럽게 정신, 줏대라는 비유적 의미를 띠게 된다. 얼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열에서 변한 말이다. 얼이 20세기 초 문헌부터 보이기 시작하므로 그렇게 역사가 있는 단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고품격 단어인 '얼'이 겨우 신체 부위의 하나인 쓸개를 뜻하는 열에서 왔다고 하니 좀 힘이, 열이 빠진다. 하지만 말은 그 형태든, 의미든 간단없이 변한 것이어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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