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신체 장기(臟器) 중에서 ‘쓸개’는 흥미롭습니다. 간, 위, 폐, 심장 등은 모두 한자어인데 쓸개는 순우리말이라는 점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물론 폐를 ‘허파’라고 하고 심장을 ‘염통’이라고 하고 위를 ‘양’이라고도 합니다. ‘양’이라는 어휘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위를 양이라고 하는 예는 ‘양이 크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에게 양이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말을 합니다. 양이 많다거나 적다거나 하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양이 많고 적은 것은 먹는 음식의 양을 말하는 것이지요. 반면 양이 크고 작은 것은 ‘위’의 크기를 의미합니다. 즉, 위가 우리말로 양입니다. 음식의 많고 적음을 나타내는 양(量)은 한자어입니다.
염통과 심장의 경우를 보면 한자어와 순우리말의 느낌이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한동안 한자어로 된 어휘를 순우리말로 쓰자는 ‘말 다듬기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고민을 안겨준 어휘가 바로 ‘심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에서는 ‘혁명의 심장 평양’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고 있었는데, 이를 ‘혁명의 염통’으로 바꾸려니 너무나 어색했던 것이죠. 그래서 느낌이 너무 달라지는 것은 그냥 한자어로 쓰기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허파는 활유법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세먼지가 심해져서인지 숲을 탁한 공기를 걸러주는 허파라고 비유하는 표현이 많아졌습니다. 아무래도 숲을 폐라고 비유하는 것은 어색한 것 같습니다. 허파가 더 역동적이고 싱싱해야 한다는 생각에 폐 대신에 허파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 같습니다. 한자어와 순우리말은 이렇게 어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쓸개’는 담(膽), 담낭(膽囊)이라는 한자로 쓰는 게 오히려 어색해 보입니다. ‘담이 크다’든지 ‘담력이 있다’는 말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말 속담에도 쓸개는 자주 등장합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는 말이나 ‘쓸개 빠진 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쓸개 빠진 놈이라는 표현이 줏대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 봐서 쓸개는 줏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도 쓸개도 없다’는 표현도 있는데 역시 줏대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한편 담력이라는 말이나 대담(大膽)하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쓸개는 용기를 의미하는 장기이기도 하다.
쓸개라는 어휘는 ‘쓰다’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쓸개의 맛이 아주 쓰기 때문입니다. 방언에서는 ‘쓰레(전남 방언)’라는 표현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개’가 명사형으로 붙어있는 어휘를 보면 주로는 리을 받침의 어간입니다. ‘날개, 깔개’와 같이 말입니다. 따라서 쓰다가 ‘쓸’로 변하는 것과 유형과는 다릅니다. 이렇게 변하는 유형을 찾아야 쓰다와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우개, 따개’처럼 어간에 ‘개’가 붙는 게 일반적입니다. 계속 고민이 필요한 어휘입니다. 쓴맛의 쓸개가 용기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잠깐 생각을 해 봅니다. 쓴맛도 맛 중에서는 중요한 맛입니다. 쓰다고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쓴맛에 빠지면 그 맛을 더 즐기기도 합니다. 커피의 맛이나 나물 중에서 씀바귀를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쓸개는 간에서 분비된 쓸개즙을 저장하는 가지 모양의 주머니다. 주머니 모양이라 담(膽)이나 담즙에 낭(囊 주머니)을 붙여 담낭, 담즙낭이라고도 하고, 쓸개에 주머니나 자루를 붙여 쓸개주머니, 쓸개자루라고도 한다. 물론 일상에서는 쓸개가 널리 쓰인다.
쓸개는 15세기 문헌에 쓸게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쓸게와 같은 의미의 단어로 열도 있었다. 열은 한동안 쓸게와 함게 쓰이다가 사라졌다. 현재 열뜨다(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주변 일에 우왕좌왕하다), 열없다(담이 작고 겁이 많다) 등에 흔적을 남긴 채 강원, 경기, 평안 방언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지역에서는 웅담(熊膽 곰의 쓸개)을 곰열이라한다. 오늘날 혼(魂)을 뜻하는 얼도 이 열에서 온 것이다.
쓸게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고(苦)의 쁘다(쓰다)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쁘다의 관형사형 쁠에 접사 '게'가 결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쓸개즙이 매우 쓰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어서 의미론적으로는 타당해 보이지만, 조어론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다. 형용사의 관형사형에 접사 '게'가 붙는다는 것은 우리말 조어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쁠이 만약 관형사형이라면 그 뒤에는 접미사가 아닌 체언이 와야 한다.
쁠게가 쁘다에서 파생된 명사라는 설을 의심하는 쪽에서는 이를 만주어 'silxi', 여진어 'silixi' 등과 비교되는 슬게에서 온 말로 본다. 슬게는 옛 문헌에 나타나지 않지만 제주 방언 슬게, 실게, 실개 등을 통해 그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슬게가 어떻게 쁠게로 변했는가 하는 점이다. 중세국어에서 'ㅄ'은 'ㅂ'과 'ㅅ'이 각각 발음이 나는 이른바 어두자음군이어서 'ㅅ'과는 음성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슬게가 쁠게로 변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쓸개즙의 맛이 쓰기에 쁘다를 연상하여 슬게를 쁠게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슬게의 어원이 무엇이냐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15세기 쁠게는 17세기 말 문헌에 쁠개로 변해 나온다. 쁠게가 쁠개로 변한 것은 '에'와 '애'가 이중모음에서 단모음으로 바꾼 뒤 상호 혼동되었기때문이다. 쁠개는 어두자음군 'ㅄ'이 된소리로 변한 뒤에 쓸개로 표기되기도 한다. 현재와 같은 쓸개는 18세기 말 문헌에 보인다.
한편, 15세기으 쁠게는 일부 지역 방언에서는 'ㄹ' 뒤의 'ㄱ'이 'ㅇ'으로 교체되어 쁠에로 변하기도 한다. 쁠에가 쁘레를 거쳐 현재 강원, 전북 등지으 방언에 쓰래, 씨래로 남아 있다. 지역에 따라 'ㄹ' 뒤에서 'ㄱ'을 유지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 것이다. 쓸개에 대한 쓰래는 '날개(날-+-개)에 대한 나래의 관계와 같아서 흥미롭다. 쁠게가 쁠에로 변하기도 한 것을 보면, 쁠게가 어간 '쁠-'에 접미사 '-게'가 결합된 어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ㄹ' 말음을 가진 어간 뒤의 'ㄱ'은 'ㅇ'으로 교체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간 '쁠-'이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마땅한 정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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