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지고 싶어 환장했냐!”
불쑥 끼어드는 차량 운전자가 흔히 듣는 욕설이다. 한데, 알고 보면 저 말은 욕이 아니다. 표준사전을 보자.
*뒤지다: 1. ①걸음이 남에게 뒤떨어지다.(그는 선생님보다 서너 걸음 뒤져 걸었다.…)
②능력, 수준 따위가 남보다 뒤떨어지거나 못하다.(문화 수준이 뒤진 나라.…)
③시간에 있어 남보다 늦다.(내 생일은 그보다 3일 뒤진다.)
2.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하다.(시대에 뒤진 사고방식.…) 이렇게, 수준이 떨어지거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일 뿐, “죽고 싶으냐”는 뜻은 아닌 것. 저럴 땐 ‘뒤지다’가 아니라 ‘뒈지다’를 써야 했다.
*뒈지다: ‘죽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혼자서 그 골방에서 굶어서 뒈지든지 사람들한테 또 몰매를 맞아 뒈지든지 알아서 해라.〈한승원, 해일〉…)
어쩔 수 없이 인생에서 죽음은 삶에 못지않은 중요 관심사다. 죽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언어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다양한 죽음 관련어를 만들어냈다. 이런 말들은 맞이하는 죽음이 어떤 종류나에 따라 달리 선택된다. 고귀한 죽음이면 돌아가시다, 작고하다, 별세하다, 타계하다, 귀천하다 등이, 하찮은 죽음이면 거꾸러지다, 뒈지다, 뻗다, 골로 가다, 고택골로 가다, 밥숟갈을 놓다 등이 선택된다.
이들 죽음과 관련된 말 가운데 가장 속된 말은 아마도 뒈지다가 아닌가 싶다. 나가 죽어라와 나가 뒈져라, 맞아 죽었다와 맞아 뒈졌다를 비교해보면 뒈지다가 얼마나 막되고 상스러운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뒈지다가 본래부터 죽다에 대한 속된 말로 쓰인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다른 의미로 쓰이다가 죽다는 의미를 나중에 얻은 것이다. 또한 그 어형도 처음부터 뒈지다가 아니었다.
뒈지다에 대한 중세국어는 확인되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7세기 문헌에 나오는 뒤어디다다. 뒤어디다는 동사 뒤다의 활용형 뒤어와 동사 디다가 결합된 어형이다. 뒤다는 중세국어 드위다로 소급하며, 틀어지거나 구부러지다의 뜻이다. 현대국어에 뒤다가 남아 있으나 잘 쓰이지 않는다. 디다는 낙(落)의 뜻으로 현대국어에 지다로 남아 있다. 이렇게 보면 뒤어디다는 뒤집어지다 정도의 의미를 띤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의 뒤어디다는 같은 시기 문헌에 뒤여지다로 나오기도 한다. 이들은 구개음화하여 뒤어지다와 뒤여지다로 변한다. 또한 의미도 뒤집어지다에서 죽다로 변한다.
"뒤여질 놈" <광재물보 1800년대>
"져 경칠놈이 여긔셔 뒤어지면 우리가 큰일이 날 터이니"<김교제 목단화 1911>
에서 보듯 뒤여지다, 뒤어지다가 놈과 같이 쓰이는 것을 근거로 하면 의미가 변하면서 속된 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뒤집어지다에서 죽다로의 의미 변화는 뒤집어지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죽다는 의미를 새로 얻은 뒤어지다와 뒤여지다가 20세기 초 문헌까지도 보인다. 그러다가 뒤어지다는 축약되어 뒈지다로 변한다. 뒈지다는 나도향의 소설 <뽕 1925>에서 확인된다. 사전으로는 뒈지다가 <조선어사전 1938>에 처음 올라 있으며, 뒤어지다에 대한 부표제어로 되어 있다. 반면 <조선말큰사전 1949>에서는 뒈지다를 표준어로 삼고, 뒤어지다를 비표준어로 처리하고 있다. 한편 뒤여지다는 현재 제주 방언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죽다의 속된 말인 뒈지다가 뒤집어지다라는 의미의 뒤어디다에서 온 말이라고 하니 매우 흥미롭다.
'우리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어원자료_오랫동안 생각하다 (1) | 2024.01.25 |
---|---|
맨발의 어원자료_아무 것도 없는 맨과 민 (1) | 2024.01.25 |
말 vs 말씀_쓰임새 (1) | 2024.01.25 |
마음 vs 가슴_쓰임새 (1) | 2024.01.25 |
떼 vs 억지 vs 고집_쓰임새 (1) | 2024.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