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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마음 vs 가슴_쓰임새

by 61녹산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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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마음이 아프다’는 말과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마음과 가슴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마음이 시리다는 표현보다는 가슴이 시리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마음이 미어진다는 표현보다는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이 더 호소력이 있다. 마음과 가슴을 한자는 심(心) 흉(胸)으로 구분한다. 마음 심장을 의미하였고 가슴은 심장이 포함된 가슴 부분을 의미하였다. 영어에는 soul, mind, heart, breast, spirit가 있지만 정확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용어는 없고 가슴을 표현하는 heart가 있다. 우리들의 학창 시절에 즐겨듣던 보니테일러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에서 느끼는 그런 감정이 heart이고 가슴이다.

 

순우리말인 '마음'과 '가슴'은 다른 듯 비슷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섬세하게 언어 생활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는, 마음과 가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엄청난 정신적인 충격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났을 때, 가슴 한 부분에 응어리가 꽉 막히는 듯이 뭉쳐지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마음이 아닌 가슴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가슴은 마음보다 좀 더 실체가 있다. 반면 마음은 실체가 확실하지 않다. 가슴은 외부적 인연들과 구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외부적인 요인이 원인이 되어 작용하면 바로 가슴으로 연결된다.

 

반면 마음은 좀 더 내부적 요인으로 외부요인보다는 내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남녀 간의 사랑 같은 외적 요인은 가슴으로 작용하고 영어 heart에 부합하다. 그와 다르게 종교적인 사랑이나 인류애와 같은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다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내외적인 사랑이 공유된 마음과 가슴이 모두 작동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결국 외부 요인에 의한 경우는 가슴이 아프고, 내면 요인인 외로움이나 우울 등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처럼 두 개가 혼재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마음과 가슴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 필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차분히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마음과 가슴이 조금 다름을 인지한다. 확실하게 가슴은 외부와 연결고리가 강함을 인지한다. 가슴 아픔과 마음 아픔이 다르고, 가슴으로 느끼는 기쁨과 마음으로 느끼는 기쁨이 다름을 본다.

 

마음이 아프다고 느낄 때, 마음이 아픈 것인지 가슴이 아프고 시린 것인지를 스스로 구분할 수 있다면 위로를 받거나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음인지 가슴인지는 모르지만 우선 느끼는 것이 아픔인지, 시림인지, 외로움인지, 우울인지를 스스로 파악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든가 혹은 파산을 하였다든가 등등은 확실하게 본인이 외부요인인 것을 인지하는 경우이며, 가슴 아픔이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원인이 해결되면 조금씩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반면 외로움이나 우울처럼 내면에서 올라오는 것이 원인인 경우에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마음속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슴 아픔은 시간에 따른 힐링이 필요하고, 마음 아픔은 힐링이 아닌 치유가 필요하다. 가슴 아픔의 힐링은 시간과 휴식과 원인 해결이 필요하다. 반면 아픈 마음 치유는 위로와 사랑, 종교, 명상, 상담, 관심 등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마음이든 가슴이든 아프거나 저리거나 숨이 막히도록 시리다면, 그 마음·가슴과 직면하고 어디서 시작된 것이지 스스로 인과관계를 차분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 후 본인에게 힐링이나 치유할 기회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완전 탈진과 자포자기로 미력마저 상실한 상태라면 심각한 상태로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한 상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극복이나 견디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 마음이나 가슴 아픔은 극복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힘들어진다. 정신력으로 극복하라는 말은 다리가 부러져 석고 케스팅한 사람에게 달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견뎌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는 석고 케스팅도 하지 말고 견디라는 말과 같다. 마음과 가슴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아픈 누군가 있다면 다리가 부러진 환자처럼 극복과 견디는 방법이 아니라 힐링과 위로를 통한 치유만이 유일한 해결방법이다.

 

 

 

가슴

 

 

 

가슴이 여섯 근이면 가슴이 숯등걸이 된다.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 하여 여섯 근이 되는 동안 어느 가슴이 온전하게 있겠는가? 가슴은 불 때문에 타는 것이 아니라 걱정과 불안 때문에 탄다. 가슴이 섬뜩하거든 크게 소리쳐 보라. 그러면 불안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가슴이 두근거리거든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새겨 보아야 한다. 혹시 남의 가슴에 못을 박지 않았는지? 만일 가슴이 뜨끈함을 느끼면 얼른 반성하고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가슴이 찔리는데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가슴은 희망의 전령사다. 가슴이 설레는 것은 좋은 일이 다가온다는 소식이고, 가슴이 벌렁거리면 기쁨이 이미 다가왔다는 증거다. 그러면 머지않아 가슴이 뿌듯한 감정이 밀려와 스스로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질 것이다. 어쩌면 너무 기뻐서 가슴이 터져 버릴 수도 있다. 가슴이 터질 것 같거든 입을 벌리고 마음껏 숨을 내쉬어서 가슴을 진정시켜야 한다. 

 

가슴은 백지처럼 깨끗하고 눈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흔적이 남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한이나 슬픔은 쉽게 가슴을 앓게 하고, 그 가슴앓이로 인해 가슴이 미어지게 된다. 그러니 가슴을 짓찧는 고통과 슬픔을 사람에게 안기지 마라.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다는 말은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말이다.

 

가슴은 마음의 곳간이다. 가슴에 사무치는 한은 가슴에 맺히고, 사랑의 속삭임은 가슴 깊이 울린다. 심장을 찌르는 말을 삼가고, 심장이 멎는 듯한 격정을 다스려라. 가슴이 답답할 때에는 사랑의 속삭임을 되새기고, 가슴이 아릴 때에는 육자배기 한 가락으로 달래야 한다. 그러나 앞세운 지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를 달랠 수 있을까? 가슴이 뜨거운 자들이여, 서로 흉금(胸襟)을 털어놓고 가슴이 뻥 뚫려 가슴이 후련해질 때까지 이야기하라. 마음이 상처가 한이 되어 가슴에 쌓이지 않도록.

 

가슴속에 마음이 있다. 무엇을 오래 마음에 두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마음이 무거워지면 가슴에 스트레스가 쌓인다. 무엇에라도 마음을 붙이고, 마음에 없는 말아리도 내뱉고 나면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제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쉽게 불평하는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은 곧 제 마음에 상처를 만드는 것이고 그 상처는 가슴에 새겨진다.

 

그런데 가슴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가슴을 헤치지도 하고, 가슴을 여미기도 한다는데 도대체 어디를 헤치고 어디를 여민단 말인가? 가슴이 빈약하다는 말에 가슴을 후비는 듯한 아픔을 느끼는 여인들. 여인에게 가슴이라면 바로 젖가슴을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여인이 젖가슴을 드러내는 게 가슴을 헤치는 것이고, 그것을 감추는 게 가슴을 여미는 것이란 말이겠군. 그리고 그 속에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지. 아기를 살리는 젖이 가슴에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아이를 향한 엄마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은 조물주가 만든 참으로 멋진 설계가 아닌가! 마음에 없는 염불은 할지언정 가슴에 없는 사랑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뇌의 작용이다

 

 

 

심리학을 한다고 하면 얼핏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은 관상이나 운명 철학, 혹은 독심술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인간의 마음에 대해 궁금해하던 사람들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과학적 엄밀성은 떨어지지만 그나마 대중적 관심이 높은 지크문트 프로이트나 카를 융, 알프레트 아들러 등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들어보거나 공부한 적이 있다면 심리학의 한 학파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한민국 지도에서 사람들이 낚시나 휴양을 위해 가끔 가는 작고 예쁜 섬 하나 정도에 비유하면 어떨까. 그 예쁜 섬도 대한민국의 중요한 일부이고 그곳에서 휴양하는 사람들도 대한민국 국민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일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도 아니고 전형적인 생활 모습도 아니다. 대부분의 현대 심리학자들은 예쁜 섬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직관이나 통찰, 혹은 일부 제한된 사례 연구 등에 의한 방법으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에 매우 주저한다. 주저할 뿐 아니라 아주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심리학(psychology) 혹은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하며, 과학적 엄밀성을 매우 강조한다. 과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화학이나 물리학, 생물학 등을 떠올리고 화학물질이나 물리적 대상을 연구하는 과학자를 떠올릴 것이다. 어떤 물질이 어떤 분자구조로 구성돼 있는지, 그 질량은 얼마인지, 빛의 밝기나 속도 등을 측정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과학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과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은 어떨까? 사람들의 감각, 지각, 학습, 지능, 성격, 정서, 마음의 건강상태 등을 측정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외부 세계를 우리 마음이 어떻게 지각하는지 연구한다고 생각해 보자. 물리적인 빛의 밝기를 우리 인간은 어느 정도 밝다고 지각하는지, 물리적인 소리의 크기를 우리 인간은 어느 정도 크다고 판단하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즉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 우리 인간의 마음이 지각하고 생각하는 바를 측정할 수 있다.

가령 물리적인 빛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빛이 있고(가시광선), 볼 수 없는 빛이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일단 물리적인 세계와 심리적인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볼 수 있는 빛의 밝기도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빛의 강도가 특정한 값에서 두 배가 됐다고 우리 인간이 지각하는 빛의 밝기도 두 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소리란 공기의 진동에서 비롯되는데, 소리의 높낮이나 크기를 나타내는 주파수나 진폭은 각각 헤르츠(㎐)와 데시벨(㏈)로 나타낸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주파수(가청 주파수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20㎐에서 2만㎐ 사이) 안에서도, 500㎐와 1000㎐ 소리 높낮이의 차이와 1000㎐와 1500㎐ 차이는 물리적으로 500㎐로 같지만 우리는 같은 음높이의 차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물리적으로 2㏈을 1㏈보다 두 배로 더 큰 소리로 지각하지도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물리적인 빛과 소리의 변화를 우리의 마음에서는 다르게 지각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TV에서 빛의 밝기나 소리의 크기를 조정할 때 나타나는 숫자나 간격 표시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반영해 만든 지표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렇게 물리적 세계와 심리적인 세계의 관계를 연구하는 심리학의 분야를 정신물리학(psychophysics)이라고 한다. 약 140년 전에 심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서 시작하게 만든 정신물리학적 접근 방법은, 수천 년 동안 마음에 대한 주관적·직관적 논쟁에서 벗어나 마음에 대해 수량화·객관화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가 가능함을 보여줬으며, 오늘날 현대 심리학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심리학의 한 분야이며 접근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심리과학의 주제가 되는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선 독자들이 각자 생각하는 마음이란 무엇인지 먼저 스스로 대답해 보기를 바란다.

필자는 대학에서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의를 지난 몇 년 동안 개설했는데, 학기 초마다 수강생들에게, “마음이란 ∼이다”라는 명제를 채워 넣는 과제를 주곤 했다. 이들의 대답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어떤 학생은, 마음이란 본능이다, 혹은 느낌이라고 대답한다. 마음이란 자신을 움직이는 어떤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고, 마음이란 곧 자신이고 타인과 구별해 주는 것이라 말하는 학생도 있다. 혹은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하는 학생도 있는 반면, 어떤 학생은 마음이란 절대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학생은 마음을 다양한 대상에 비유하기도 한다. 가령, 마음은 마치 돌과 같다거나 혹은, 얼음, 파도, 신, 그릇, 바람, 거울, 나침반, 우주, 심지어 오렌지에 비유한 학생도 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마음이 다른데, 과학자들은 어떻게 마음을 연구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생각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마음의 정의가 다르다면, 우리는 마음에 대해 어떻게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가 마음에 대해 공통된,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통일된 마음의 정의를 하지 못한다 해도 마음을 연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축구나 카드 게임 등 우리가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다양한 게임을 하나씩 이해하다 보면 전체적인 게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마음 역시 한마디로 그 개념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여러 감정이나 기억, 추론 등을 연구하다 보면 마음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더 정확한 정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제 독자들이 생각하는 마음과 관련해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본다. 독자 여러분은 마음과 연관해 무엇이 궁금한가? 질문은 모든 학문의 시작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얘기가 있듯이, 좋은 학자가 될 사람은 그 사람의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음과 관련해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과학적으로 연구 가능한가?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앞서 언급했지만, 마음과 관련해 아무리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일단 그 질문은 접어야 한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가?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정말 중요한 질문이지만 과학적 접근이 불가능한 질문이다. 과학자 입장에서 이런 질문에 매달리는 것은 시간 낭비고, 자원 낭비다. 오히려 그동안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질문일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배우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아직 과학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하지만 과학적으로 연구 가능한 질문을 발견할 때 과학자들은 연구의 즐거움을 찾게 된다. 사실 마음과 관련, 아직도 과학적 연구를 기다리는 중요한 질문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가령, ‘가’라는 글자를 보고 그것이 ‘가’라는 글자인지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까?

이런 질문을 대학생들에게 하면, 대부분 학생은 “그렇게 생긴 모양이 ‘가’라는 글자라고 배웠으니까 알죠”라고 대답한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우리 뇌에 ‘가’라는 글자가 어떻게 저장돼 있고, 그 외부의 ‘가’라는 빛 얼룩이 뇌에 저장된 ‘가’라는 글자와 동일한 것인지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알게 되는지, 사실 그 과정 자체는 모르는 문제다. 재미있는 사실은, 분명 우리가 ‘가’라는 글자를 보고 그것이 ‘가’라는 글자인지는 알지만, 어떻게 아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하고 사용하는 것은 알지만, 자동차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움직이고 그 복잡한 회로가 어떻게 돼 있는지는 모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되는지는 전혀 모른 채 그 마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생소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통해 글자나 사람의 얼굴 등을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가 많은 연구를 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일을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이런 일을 우리 마음이, 우리의 뇌가 어떻게 하는지를 잘 몰랐던 것뿐이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과학자, 인지과학자들이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독자들은 어느 정도 눈치챘을 수도 있다. 마음이란 바로 뇌가 하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마음이란 뇌가 하는 정보처리 과정 혹은 정보처리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오늘날 대부분 심리과학자는 마음을 연구한다.

정보처리 과정이라고 하면 언뜻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우리의 눈이나 귀를 통해 외부의 빛 정보나 소리 정보를 받아들여서 이를 해석하고 변형하고 저장하고 사용하는 일련의 과정이 바로 마음이라고 우리가 불러온 것이다.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 마음과 관련해서 이런 말도 했다가, 그것과 상반된 또 다른 얘기도 했다가 하는 것은 마음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말장난이다. 우리는 마음과 관련해 어떤 말이 말장난이고, 어떤 말이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밝혀진 과학적 증거인지를 구분해서 제대로 된 마음의 실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음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야말로,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인류로 거듭난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필수조건인 것이다.

■ 용어설명

심장 가설과 뇌 가설 :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우리의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놀라거나 흥분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끼며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착각했는지 모른다. 마음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보면 2500년 전 엠페도클레스(BC 495∼435)는 우리 마음이 심장에 있다(심장 가설)고 생각했고, 비슷한 시기에 알크마이온은 마음이 뇌에 있다(뇌 가설)고 생각했다. 이런 논쟁은 근대 과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2000년 넘게 계속됐다. 500년경 성 아우구스틴은 마음이 뇌실(뇌를 들여다보면 뇌척수액이 차 있는 빈 공간)에 있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이제 우리는 마음의 기관이 뇌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뇌 모양이 아닌 하트(심장) 모양을 마음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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