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쌓지 않아도 돌이 모여 다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징검다리가 그런 곳이다. 사람이 건널 수 있는 가장 원시적인 다리 형태로서 주변의 바윗돌을 이용해 건너기 적당한 간격으로 가설하였다. 정원이나 연못에 놓인 디딤돌 역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 징검다리로 오늘날 남아 있는 다리 중에서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다리이다. 옛 지도나 그림에 자주 등장했던 개천의 흙다리는 지방에 따라 ‘섶다리’라고 불렀다.
대개 가을걷이가 끝나면 주민들 손으로 만들어졌던 섶다리는 나룻배가 오가기 힘든 겨울을 나기위해 놓은 다리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여름철 홍수로 무너지면 다리는 수명을 다한다. 구조가 튼튼하지 못해 매년 다시 놓는 불편함도 있었으나 노동을 통해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축제의 목적도 있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산간지방에서는 흙다리를 볼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나무다리는 시공이 쉬워 여러 곳에 설치돼 있었다. 석재보다 오래가지 못해 남아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지만, 정선 동강에는 최근까지도 나무를 이용한 다리가 남아 있으나 산간지방의 고령화로 인해 다리를 놓을 사람이 부족해지면서 시멘트 다리로 바뀌고 있는 현실이다. 나무다리는 독특한 형태의 운치가 있다. 물과 하늘이 하나 된 정겨운 풍경이 사라져 가니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나라는 석재가 풍부한 만큼 돌문화도 발달하였다. 현존하는 다리 중에서도 돌다리가 가장 많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형태로 변해 왔다. 석재 한 장을 걸쳐놓은 널다리부터 조형미가 뛰어난 무지개 모양의 홍예다리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우리나라 궁궐 정전 앞에는 어김없이 물이 흐르는 작은 어구가 있다.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명당수가 있어야 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조 궁궐다리의 금메달감으로 꼽히는 창덕궁 금천에 걸쳐진 돌다리가 금천교이다. 태종11년(1411)에 가설한 왕궁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금천교는 길이 13미터, 폭 12미터로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다리상판은 세부분으로 돼 있다. 가운데 길은 임금만이 다닐 수 있었다. 난간 곳곳에는 동물상이 조각돼 있는데 모두 익살맞고 재미있는 표정들이다. 다리에 동물상을 세운 것은 삿된 것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다. 나라의 임금이 살고 있는 궁궐의 위용과 더불어 금천 위에 가설한 돌다리는 하나같이 예술품이다. 마을사람들이 내를 건너기 위해놓은 흙다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궁궐의 지엄한 명과 완벽한 설계도, 균형과 조화의 조각품이다. 금천교는 석교예술의 극치로 꼽는다. 하지만 지금의 다리자리는 원래 위치가 아닌 것 같다는 추청 때문에 그 흔한 보물지정 반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조선성종 14년(1484) 창경궁을 건립할 때 가설한 옥천교는 정문인 홍화문을 지나 명정문에 이르는 길 위에 놓여 있다. 다리 길이가 9.5미터, 폭 5.8미터로 두 개의 반원형 홍예로 가설해 다리 양끝에는 석수를 깎아 세웠으며 다리아래 홍예 중앙에는 귀면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임진왜란 때 창경궁 전체가 소실 됐으나 옥천교는 화를 면했다. 건립당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다리다. 난간의 장식이 섬세하고 조형미가 뛰어나 궁궐다리로서 유일하게 보물 제386호로 지정됐다.
전남 나주시와 함평군 학교면을 잇는 고막석교는 오랜 세월 풍화로 돌이 깎이고 패였지만 지금도 이 다리는 마을에서 들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길이 20미터, 폭 3.5미터, 높이 2.5미터로서 5개의 교각 위에 판석을 깐 널다리이다. 다리기초는 바닥 뻘에 생나무말뚝을 전 구간에 걸쳐 촘촘히 박고, 그 위에 장방형의 절석을 정교하게 깔아 급류에도 휩쓸리지 않도록 했다. 지난 2001년 다리 보수공사를 하면서 바닥기초에 쓰였던 나무말뚝의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시기가 1,000년 전 고려시대로 추정됐다. 고려시대의 다리원형을 간직한 보기 드문 공법을 사용했으며, 석교가 지닌 교량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보물 제1372호로 지정됐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뚝섬역을 지나 한양대역 쪽으로 가다가 보면 탁류가 흐르는 개천을 지난다. 그 개천을 가로지르며 놓인 다리가 살곶이다리(전곶교)다. 돌다리 중 국가사적(제160호)으로 지정 될 만큼 역사성이 있는 돌다리도 이곳 뿐이다. 다리의 원래이름은 제반교였으나 이성계가 이곳에서 사냥을 즐기며 주변에 활을 쏘았던 곳이라 해 살곶이다리라 불리게 됐다. 세종 3년(1420)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홍수가 잦아 63년 뒤인 성종 14년(1483)에 완성됐다. 다리의 형태는 수수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조선초기의 교량기술의 완벽함을 보여준다. 옛날 한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타기 위해서는 이 다리를 통해야만 했는데 강릉으로 가는 광나루, 송파로 통하는 삼전도 나루터,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으로 가는 왕의 참배길도 살곶이다리를 이용해야만 갈 수 있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옛 다리를 찾아가면 우리의 다리가 가지고 있는 형태와 재질의 다양함에 놀란다. 세계 유명 관광지 다리들의 아름다움에만 익숙해진 우리의 눈에 소박하고 단아한, 그러면서 멋스러운 우리고유의 아름다움이 깃들인 옛 다리는 반갑기가 그지없다. 남한의 최북단 건봉사의 능파교부터 제주도의 명월대교까지. 익숙한 고궁과 고찰의 유명한 다리는 물론이고, 인적이 드문 길가의 작은 다리까지 다리가 가지고 있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또한 다리가 길과 길을 이어주면서 각 지역마다 자연스럽게 다리와 관련된 전설이 생겨났다. 지명과 도로 이름도 다리와 연관 지어 붙이기도 했다. 이는 다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다리와 연계된 놀이문화도 오늘날까지 민속놀이로 전해지고 있다. 놋다리밟기는 안동, 의성지방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밤에 모여 벌이는 축제이다. 그 유래는 고려 공민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이 왕비인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 지방으로 파천 왔을 때 고을 주민들이 모두 나와 영접하려 했으나, 개천이 길을 가로막아 왕비가 건너지 못하자 젊은 아낙네들이 일렬로 엎드려 다리를 놓아 노국공주를 건너게 했다는 이야기다. 그 뒤부터 이 지역 부녀자들이 그때를 기념키 위해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밤 다리 밟기를 하게 됐다. 그날 밤에 다리를 밟으면 일 년 동안 다리에 병이 없고 무병장수한다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다. 우리의 옛 다리는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며 만남을 주선하는 장소가 되었고, 사람들은 다리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주고받았다. 그곳에는 고단한 삶을 묵묵히 건너간 옛사람들의 정취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강의 이쪽과 저쪽을 건너질러 사람이나 자동차가 지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다리이다. 그런데 사람의 다리와 음이 같아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놈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만들어 아이들을 울리곤 한다. 이 다리가 엄마의 다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원래 다리란 강이나 바다 위를 건너질러 놓인 것이 아니었다. 산에 갔을 때에 시냇물을 만나면 우리는 물 중간에 놓인 돌을 이리저리 디디고 건넌다. 시냇물 중간에 박혀 있는 이 돌들이 다리의 시초인 것이다.
다리는 기본적으로 하나하나 발을 디디며 조심스럽게 건널갈 수 있도록 놓은 돌을 의미했다. 징검다리라고 하는 다리가 그것인데 여기에 놓인 돌을 징검돌이라고 한다. 징검돌로 다리를 만들어 징검징검 물을 건너던 사람들이 돌을 좀 더 높이 쌓기 시작했다. 큰물이 흐르더라도 건널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징검돌 사이에 평평한 돌을 걸쳐 놓기 시작했다. 이 돌을 다릿보라고 하는데 이것을 걸쳐 놓음으로써 냇물 위로 걸어서 건널 수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릿보 사이에 흙이나 자갈을 메움으로써 마치 평지의 길처럼 사람과 동물 그리고 수레 같은 것까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했다.
다리의 발전 과정은 다리와 관련된 말의 분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높은 건물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다리 또는 사닥다리라고 하는 다리를 이용한다. 아래쪽에서 위를 향하여 올라가는 다리라는 뜻으로 사다리라고 한 것이다.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가는 계단을 섬(이 말은 서다와 관련된다.)이라고 하는 것과 위로 올라갈 때 스는 다리를 사다리(서다리가 변한 말임)라고 하는 것은 어휘 발전의 일관성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건물 안에서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든 다리를 층다리 또는 층층다리라고 하고,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를 죽 붙여 놓은 것을 배다리라고 한다. 돌을 놓아 만든 다리는 돌다리, 흙을 매워 만든 다리는 흙다리, 나무를 얽어 만든 다리는 나무다리라고 하는데, 통나무 하나만을 건너질러 놓은 것을 특히 외나무다리라고 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는 속담이 생긴 것은 이 나무다리 덕분이다.
다리 가운데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복찻다리이다. 이 다리는 대로를 가로질러 흐르는 시내 위에 놓은 다리를 일컫는 말이다. 즉 길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흐르는 시내를 가로지르는 다리인 것이다. 일반 다리는 길보다는 냇물의 흐름이 주가 되지만 복찻다리는 물보다는 도도히 뻗어가는 길에 더 주안점을 둔다. 복찻다리는 대개 배부른다리로 시작해서 배고픈다리로 끝난다. 가운데가 볼록한 다리가 배부른다리이고 사람과 우마차가 자주 다녀서 가운데가 우묵해진 다리가 배고픈다리다. 그래서 이 다리를 배다리라고도 부른다. 복찻다리는 매우 짧아서 한길에서는 다리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 된다. 그러다가 눈이 오는 날 길의 다른 부분보다 눈이 녹지 않는 부분이 나타나면 그곳이 복찻다리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눈 내리는 날 복찻다리 위에서 급정거하면 미끄럼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매우 높다.
다리를 세운다는 말은 다리를 놓는다는 말과 같다. 과거 징검다리를 만들 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놓다를 사용하는데, 지금은 대개 다리기둥을 먼저 세우고 그 위에 다릿보를 걸친 뒤에 평평한 판을 올려서 다리를 건설하기 때문에 다리를 세운다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다리를 이용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것을 다릴르 건넌다고 표현한다. 실제로는 다리를 이용해서 내나 강을 건너는 것인데 다리를 건넌다고 한다.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이동하는 것을 몇 다리를 거친다고 한다.
"이 물건은 중간에 몇 다리 거쳐서 나에게 왔다."
라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때 몇 다리 건너서라고 할 수도 있다. 누구를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주선해 달라는 말과 같다.
"자네가 다리가 좀 되어 주게."
라고 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을 잇는 구실을 해 달라는 말이 된다. 또 직위가 한 계급 오른 것을 일컬어 한 다리가 올랐다고 한다. 잔다리밟다는 낮은 계급부터 차츰 올라간다는 고단한 승진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사람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말이 되었다.
다리의 한자어인 교량(橋梁)에는 이러한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 겨우 교량 역할이라는 말이 다리가 되어 주게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렇다면 교량보다 훨씬 더 생산적인 다리를 좀 광범히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한강에 걸쳐 놓은 무수한 다리 이름이 모두 무슨 대교로 되어 있다. 왜 무슨 다리라고 하지 못할까? 한강 다리를 한강 대교로 바꿔 부르면 우리 언어와 문화에 무슨 이익이, 보탬이 되는지 무척 궁금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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