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서 ‘글’과 ‘글씨’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글’은 생각이나 일 따위의 내용을 글자로 나타낸 기록을 말하고, ‘글씨’는 ‘쓴 글자의 모양’을 뜻한다. 그래서 ‘글을 잘 쓰는 것’과 ‘글씨를 잘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달필(達筆)’이라고 하면 ‘능숙하게 잘 쓰는 글씨, 또는 그런 글씨를 쓰는 사람’을 뜻하는데, ‘능숙해서 막힘이 없는 말’을 ‘달변(達辯)’이라고 하는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달필’과는 반대로 ‘잘 쓰지 못한 글씨’는 ‘악필(惡筆)’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저는 워낙 악필이라서 제가 쓴 것을 저도 읽기 힘들 정도예요.’와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악필’과 관련해서 ‘졸필(拙筆)’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졸필’은 ‘솜씨가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글씨나 글’을 뜻합니다. ‘악필’은 ‘글씨’만을 의미하는 데 반해 ‘졸필’은 ‘글과 글씨’를 모두 뜻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졸필’은 ‘글씨나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 또 ‘자기가 쓴 글씨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도 사용하고 있다. 한편
"글 잘하는 놈 낳지 말고 말 잘하는 놈 낳으랬다."
라는 속담이 있다. 과거에는 아마 말 잘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처세)에 유리했던 모양이다. 글 잘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글을 잘 짓는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이 높다는 뜻이다. 글이 짤다는 배운 것이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글이란 생각을 눈으로 보이는 것이므로 글을 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만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글, 감동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라도 말을 잘하지 못하면 대면했을 때 상대방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글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없지만 말로는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자를 이용해서 생각과 말을 적는다는 말이다. 글을 짓는다는 말은 생각을 가다듬어 일정한 틀에 맞추어 일관된 생각이 드러나도록 글을 짜서 적는다는 말이다. 학생들이 글짓기 연습을 하는 것은 시, 소설, 수필, 논술문, 보고서 등 글쓰기 능력을 기르기 위함이다. 글 속에 글이 있다는 글의 의미가 깊다는 말이다. 그런 글이 수준 높은 글이다.
글을 한자어로 문장(文章)이라고 한다. 그래서 글을 잘 짓는 사람을 문장가라고 한다. 그런데 문장은 통일된생각을 체계적으로 나열한 글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어와 서술어로 이루어진 한 단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문장의 성분을 분석한다면 주어와 서술어로이루어진 한 단위의 글을 분석한다는 말이다. 영어에서는 이런 문장은 센턴스(sentence)라고 하는데 우리말에서는 이것도 문장이라고 하고, 토박이말로는 월 또는 글월이라고 한다.
말이 소리를 이용해서 의사 전달을 한다면 글은 글자를 이용해서 의사 소통을 한다. 글자란 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기호이다. 각 낱말마다 고유의 소리가 있어 그에 해당하는 고유의 글자로 적게 되어 있다. 소리와 글자 사이에는 마주 대응되는 관계가 있다. 그 글자를 읽으면 그 소리가 나타나고 그 소리를 적으면 그 글자가 된다. 한글은 소리와 글자가 하나씩 완벽하게 대응하는 글자로서 매우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자는 글자와 뜻이 대응되도록 만들어져서 소리를 듣고 글자를 적기는 참 어렵게 되어 있다.
글씨는 글자의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 글자가 가진 고유의 형태가 일정하지만 그것을 손으로 적게 되면 근본 형태는 같아도 실제 모양은 하나도 같지 않게 된다. 마치 사람의 얼굴은 다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같지만 각자의 얼굴은 모두 다른 것과 같다. 각자가 글자를 썼을 때에 생기는 글자의 모양이 글씨이다. 따라서 글씨가 예쁘다, 글씨를 뽑내다처럼 사용할 수 있다.
글씨를 글자와 혼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컨대 글씨를 쓴다는 말은 글자를 쓴다의 잘못이다. 글씨가 크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글자가 크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 글씨 쓰기 연습이 아니라 글자 쓰기 연습이다. 글씨 연습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모된 비문의 글씨를 읽는다."
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옳다고 하기 어렵다. 글씨가 삐뚤삐뚤해서 또는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서 알아보기 어렵더라도 알아보는 것은 글자이지 글씨라고 할 수는 없다. 글씨는 감상의 대상일 뿐 읽는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 엄밀하게 말하면 글씨체의 체는 씨를 한자어로 반복한 것일 뿐이다. 글씨에 체를 붙이는 것보다는 글자체라고 하거나, 차라리 서체(書體)라는 말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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