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파동, 파장"
이 세 낱말은 언뜻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 낱말을 마치 서로 대체해서 쓸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듯하다.
바다나 호수 또는 잔잔한 강의 수면에 이는 물결이 만드는 무늬를 파문이라고 한다. 파문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거나 물속에서 물고기가 움직이거나 밖에서 수면에 돌을 던지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대개 파문을 일으킨다고 하고, 무엇이 파문을 일으키는지 눈여겨보게 된다. 사회가 잔잔한 수면처럼 아무 일 없이 일상적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큰 사건이 생기면 술렁거리게 되는데 이를 마치 수면에 돌이 떨어져 파문이 생기는 것에 빗대어 사회에 파문이 일어났다거나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따라서 '파문'은 어떤 일로 인해서 사회가 크게 술렁거리고, 소용돌이치고, 어수선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그의 이혼 발표로 연예계는 커다란 파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발표가 국제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같은 용법으로 쓰인다.
'파동'은 전파나 수파의 진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파문이란 바로 이 파동이 일으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파문'이 이 사건의 영향으로 사회가 술렁거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반면에, '파동'은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 자체를 가리킨다.
"자유당 정권은 전쟁 중에도 부산에서 정치 파동을 일으켰다."
"노동자의 총파업 파동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처럼 사회의 변동을 일으킬 만한 사건 자체를 파동으로 표현한다.
이에 비해, 파장은 파문의 크기, 정확하게 말하면 파문의 길이를 가리킨다. 파동은 같은 위상을 가진 점들이 일정하게 나타나면서 진행하는데, 한 점에서 같은 위상을 가진 이웃 점까지의 길이를 파장이라고 한다. 파장이 길면 파동이 길고 그에 따라서 파문이 커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파장은 파동이나 파문의 크기에 관련되어있는 셈이다. 즉, 파장은 파문이나 파동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종속 변수라는 말이다. 그 렇다면 파문이 일어나기 전에 '파장이 일어났다.'는 말을 쓸 수 없고, 파동이 있기 전에 '파장을 몰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파장'을 사용한 언론의 보도는 매우 다양하다. 예를 몇 개들면 이런 것들이 있다.
"대통령은 한반도 주변 정세에 미묘한 파장을 던진다는 점을 알고 대처했다."
"이러한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가 에너지 수급과 물가 안정 대책을 차질 없이 추진해야 한다."
등등, 이들 문장에 쓰인 '파장'은 모두 '파문'을 써야 한다. 수면에 돌을 던지면 파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파문이 생긴다.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렇게 생긴 파문이지 파장이 아니다. 배가 흔들리는 것은 파문 때문이지 파장 때문이 아니다.
파문과 파장의 차이가 명백한데도 언론인들이 굳이 '파문' 대신에 '파장'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사회에 워낙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 많아서 파문을 대체할 새로운 낱말을 쓰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고, 여기에 언뜻 듣기에 의미가 비슷할 것 같은 '파장'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하면 전혀 다른 낱말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도 계속 쓰고 있는 이유는 낱말을 바르게 쓰려고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호수의 잔잔한 물 위에 돌멩이를 하나 던지면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물낯 위로 번져 간다. 물결이 번지면서 마루와 골을 만들어 내는 물의 무늬를 ‘파문(波紋)’이라고 한다. 곧 수면에 이는 물결이라는 뜻이다. 이 물결은 사그라질 때까지 번져 나가므로 ‘파문’이란 단어에서 ‘어떤 일이 다른 데에 미치는 영향’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파장(波長)’은 파동(波動)의 마루와 다음 마루까지의, 또는 골과 다음 골까지의 거리를 이른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은 ‘파장「2」’에 충격적인 일이 끼치는 영향 또는 그 영향이 미치는 정도나 동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뜻풀이를 달았다. 물론 사람들이 ‘파장’을 이런 뜻으로 많이 써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사전이 언어 현실을 지나치게 따라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밀히 말해 ‘파문’과 ‘파장’은 다른 말이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127명의 수술자료를 분석한 결과 중 사망 등의 중대한 이상반응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연구보고서와 함께 카바 시술을 잠정 중지하자는 의견을 복지부에 전해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발언은 정가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실험은 정신의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오면서 진단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엄격한 지침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예문의 ‘파장’은 ‘파문’으로 바꾸는 것이 낫다. 마루와 마루 사이의 거리인 ‘파장’과 움직임이 있는 ‘파문’을 구분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발생 순서로 봐도 ‘파문’이 일고 나서 ‘파장’이 생기는 것이다. 많이 양보해 ‘파장’을 ‘파문’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불러일으키다’ ‘일으키다’ 같은 서술어와 함께 쓸 때는 ‘파문’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파장’은 ‘긴’ ‘짧은’ 같은 수식어와 잘 어울리고, ‘파문’은 ‘(불러)일으키다’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파동(波動)’도 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이 퍼져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뜻한다. ‘쇠고기 광우병 파동’ ‘석유 파동’ 등과 같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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