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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상징어로서의 붉은악마

by 61녹산 202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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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강 붉은악마 응원

 

온 국민을 밤잠 설치게 하던 2006년 월드컵, 국가대표팀은 비록 16강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2006년 월드컵에서도 '붉은악마'를 비롯한 우리의 응원 열기는 세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붉은악마'는 띄어 서야 할까, 붙여 써야 할까? 혹여 글쓰기에서 띄어쓰기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이다. 

 

'선거전(選擧戰)'과 '선거 전(前)'이 구별되지 않고, 큰집(아우가 맏형의 집을 이르는 말)'과 '큰 집(집의 규모를 가리키는 말)'이 뒤섞일 경우 의미 전달에 실패하기 십상이다. '사회주의적자립적민족경제'란 말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말을 이렇게까지 붙여 쓰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북한에서는 오히려 이게 규범이다. 북한의 맞춤법은 나름대로 근거를 두고 만들어졌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에겐 비능률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붉은악마'는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졌고 아직 사전에 오른 말도 아니므로 '단어별로 띄어 쓴다'는 한글맞춤법 규정에 따라 '붉은 악마'로 띄어 쓰면 그만이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한 단어를 붙여 쓰고 싶다는 게 문제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단어화하지는 않았지만 단어 사이에 휴지(休止)가 잘 느껴지지 않아 붙여 쓰기 쉬운 말들이 꽤 있다.

 

공적 자금 - 공적자금

미국계 투자은행 - 미국계투자은행

적립식 펀드 - 적립식 펀드

통신용 반도체 - 통신용반도체

알 권리 - 알권리

검은 돈 - 검은돈

검은 손 - 검은손

큰 손 - 큰손

젊은 층 - 젊은층

젊은 이 - 젊은이

 

이 가운데 단어는 "검은돈, 검은손, 큰손, 젊은이'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규범적으로는 띄어 써야 맞는다. 하지만 북한에서 '적(的), 계(系), 용(用), 형(形), 식(式), 급(級), 성(性)' 따위의 접미사가 붙어 연결되는 말은 모두 붙여 쓴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사람에 따라 띄어 쓰는 게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검은손'은 흉계를 품은 손길이라는 말이며, '검은돈'은 뇌물의 성격을 띠거나 기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주거나 받는 돈이라는 뜻으로 '검다[黑]'라는 의미를 벗어나 단어가 된 말이다. 수사적으로는 전의(轉義)에 해당하며 구체적으로는 환유 또는 은유를 거친 단어다. 하지만 이마저도 비교적 최근 <훈민정음국어사전 2004>에 와서야 단어로 대접받았다. '큰손'도 마찬가지, '큰 손'은 손의 크기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큰손'은 '증시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많은 거래를 하는 사람이나 기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보면 '붉은악마'도 단순히 색깔을 나타내는 의미의 '붉은악마'가 아니라 국가대표 축구팀을 응원하는 응원단을 지칭하는 상징어로서 단어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사전에 오른 말은 아니다. 이런 말들은 그 사용 빈도나 지역적 역사적 계층적 분포 등에서 충분한 세력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단어로 승격하게 된다. 

 

최신 신조 합성어
최신 신조 합성어

 

1960년 9월 10일 저녁.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앞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우승자의 모습에 전 세계 관중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42.195km을 달려온 그는 맨발이었다. 피니시 라인 터치 직전에 벗어던진 게 아니라 그는 처음부터 맨발로 달려왔고, 전 대회 우승자의 알랭 미모웅(프랑스)의 기록을 9분 이상 단축한 세계신기록(2시간15분16초2)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승을 확정 지은 후 가진 인터뷰에서 한 바퀴를 더 달릴 수 있다는 여유까지 보였다고 한다. 당시엔 요즘처럼 실시간 인터넷이 가능하지도 않았고 언론사가 기자를 특파할 여유도 없던 시대였다. 아프리카인들의 맨발 걷기 모습을 연상하여 아베베의 맨발 투혼이 아프리카의 선수들의 특수한 훈련방법으로 전해지기도 했지만, 섣부른 추측이 빚은 오보였다. 이후의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아베베는 원래 출전키로 했던 선수의 부상으로 갑자기 투입된 선수였다. 전문선수화 메이커인 아디다스에서 마라톤화를 후원하기로 했지만 그의 발에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불편한 신발대신 맨발을 선택했던 것. 2시간 10여분을 쉬지 않고 달려야하는 마라톤에서 신발은 아주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이다. 무게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야하고 외부 충격을 흡수하는 탄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40km 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온 그에겐 ‘ 맨발의 기관차’, ‘마라톤 황제’라는 별명이 당연했다.

4년 뒤 도쿄 올림픽에서도 2시간12분11초2의 세계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 충수염수술 6주 후인데도 마라톤 2연패의 위업을 이룬 아베베를 떠올린 건 올 들어 부쩍 붐을 이루고 유행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국내의 맨발 걷기 열풍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2000년대 초기만 해도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황톳길이나 숲길을 찾는 이들은 건강에 관심이 많은 장·노년층이었다. 그러나 건강관리와 ‘워라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로 걷기효능이 확산되고 디지털 소통이 쉬워지자 확산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자연친화적인 의식이 강하고 참여와 체험을 중시하는 젊은이들, 특히 MZ세대들의 참여가 늘자 합성어까지 탄생했다. 굳이 촉감이 부드러운 황톳길이 아니어도 숲이나 공원에서 맨발로 걷는 어싱족(접지를 뜻하는 earthing과 집단을 나타내는 족의 합성어)은 재미와 건강미의 상징도 되었다. 2만5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인터넷 카페활동과 개인 SNS 활동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 수는 빠르게 늘어났고 전국의 지자체도 이에 호응, 트레킹 코스마다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을 조성하고, 전국의 유명 맨발걷기 코스가 여행지로 떠오른다.

또 MZ세대의 미각 취향을 만족시키며 만들어진 합성어가 할매니얼(할머니와 밀레니얼 세대 합성어)이다. 전통 디저트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복고성향 입맛과 트렌드 마케팅이 만나서 성공한 예. 값비싼 디저트 카페가 아니어도 편의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소포장 디저트가 등장하고 그 종류도 다양해진 점이다. 1인가구가 많은 젊은 층에서는 대형마트보다는 주거지와 가깝고 소포장 구입이 가능한 편의점이용이 늘었다. 편장족(편의점 장보기)의 탄생이 그렇다.

최근의 신조어나 합성어의 생성과정을 살펴보면 많은 기업들이 MZ세대를 겨냥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마케팅에 나서며, 미디어가 이를 신속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신조어나 합성어를 검색하면 관련 기사들이 줄을 잇는다. 성장하는 세대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언어가 잠시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일회용이어도 유행의 흐름에 따라가야 할까? 카톡 친구들이 공유하는 신조어·합성어테스트를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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