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 중에 ‘쌈짓돈이 주머닛돈’이라는 게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한복에는 원래 주머니가 없어 오늘날 지갑과 같은 쌈지에 돈을 담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그 쌈지는 유럽처럼 주로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한참 동서를 넘나들며 어원을 풀다 보니 나랏돈이나, 주머닛돈이나 쌈짓돈이나 어원이 한 통속이 돼버리는 것 같아 신기하고 재밌다. 짧게나마 공직을 맡아 보니 굳이 ‘목민심서’나 ‘김영란법’을 들추지 않더라도 국민의 혈세로 충당하는 예산을 얼마나 꼼꼼하게 편성하고 쓰임새 있게 사용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아울러 이를 기획하고 집행하는 공직자들의 자세는 또 얼마나 엄중하고 청렴해야 하는지도 재삼 절감하게 된다.
저성장과 경제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국민들은 무거운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싶어한다. 왜 그렇게 내고 또 내도 부족하냐고 다그칠 국민들의 모습이 선하다. 그럼에도 왜 실효성 없는 전시행정과 과시적 사업이 여전한지 아쉽기만 하다. 공공기관의 경영평가에 정보공개와 고객만족도 등 투명성을 중요 평가요소로 삼은 까닭을 곰곰이 살펴봐야 한다. 사회적 책임과 윤리경영도 결국은 국민들과 바르게 소통하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국가재정법’ 제100조에는 우리나라 국민 누구든 예산집행에 책임 있는 중앙관서의 장 또는 기금관리주체에게 불법지출의 증거 제출과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재정지출에 대한 국민의 직접적 감시권’이 보장되어 있다. 예산을 의미하는 단어 ‘버짓’이 ‘버저’와 어원이 닿아 있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민의 혈세인 ‘가죽가방의 돈’이‘주머니’나 ‘쌈지’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다 함께 감시하는 경고의 버저시스템이 필요할 거라는 탁견(卓見)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살기가 팍팍한 국민들의 예산낭비 경고음은 언제든 울릴 수 있는 상황이다. 국가재정 손실의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정책실명제’를 뒷받침할 법안제정요구도 있지 않은가. SNS 등 사회적 미디어가 발달하고 비밀이 없는 시대에 예전처럼 대충 허투루 예산을 낭비하고 유착해오던 관행을 끊어내지 못하면 누구든 국민의 철퇴를 맞게 될 것이다. 일부 공직자들과 나랏돈이 쌈짓돈이라 여기고 이들과의 관계로 이득을 보려는 철없는 사업자들의 빠른 현실자각이 중요해졌다.
요즘 젊은이들 MZ 세대들에게 '쌈짓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게 보통이다. 이들에게 있어 쌈짓돈은 좀 생소한 말인듯 싶다. 사전에서는 쌈짓돈을 "쌈지에 있는 돈이라는 뜻으로, 적은 돈을 이르는 말"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할머니 쌈짓돈은 대부분 손자들 용돈으로 나갔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쌈짓돈이 적은 돈을 뜻하므로 "검찰총장의 쌈짓돈이 50억 원에 이르는 것 같다."와 같은 표현은 어색한 표현이 된다. 50억 원이 적은 돈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말을 한 사람은 '쌈짓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 정도로 생각하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쌈짓돈은 쌈지와 돈 사이에 사이시옷이 들어간 어형으로 분석된다. 그러니 그 본래의 의미는 쌈지에 들어 있는 돈 정도로 풀이 된다. 그럼 쌈지는 뭘까? '쌈지'는 "예전에 담배, 돈, 부시 따위를 싸서 가지고 다니던 작은 주머니"를 말한다. '쌈지'는 18세기 문헌에 '쌈지(아래아)'로 나온다. 이 가운데 ㅄ의 쌈지가 더 옛 형태이고 이것이 쌈지로(아래아) 이 쌈지(아래아)가 쌈지로 된 것이다. 쌈지의 쌈은 동사 싸다(포(包) 싸다)의 어간 '싸-'에 명사 파생 접미사 '-ㅁ'이 결합된 파생 명사로, '싸놓은 덩이', 곧 '(감)싼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제주 방언에서 쌈 또는 쏨 자체가 쌈지를 뜻하는 것을 바탕으로 분석해 보면 이전 시기의 쌈도 쌈지를 뜻하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쌈지의 쌈도 쌈지일 것이라 미리 확정하기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
쌈지의 지는 그 정체가 더 모호한데, 다만 쌈지를 가죽, 헝겊뿐만 아니라 기름에 절은 종이로도 만든다는 점에서 한자 '지(紙)'로 추정해볼 수 있다. 비슷한 의미로 봉지(종이나 비닐 등으로 물건을 넣을 수 있게 만든 주머니)가 있어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쌈지에 넣고 다니는 돈이 바로 쌈짓돈이다. 쌈지는 아주 작은 주머니이기에 여기에 많은 돈을 담을 수 없다. 그 돈이 무게가 나가는 엽전(금속 동전)이라면 더욱이 쌈지에 담아 다니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쌈짓돈에 적은 돈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진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어린 시절 동네 어른께 인사라도 하면 허리에 차고 있던 쌈지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건네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쌈짓돈은 적은 돈이지만 내 쌈지에 들어 있으니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다. 그래서 그런지 쌈짓돈을 임의로 쓸 수 있는 돈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50억 원을 쌈짓돈이라고 해도 시비를 걸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언어는 그 사람, 사회의 반영이다. 아무리 국민의 고혈로 만들어진 세금을 검찰 총장의 특활비로 쌈짓돈 쓰듯 맘껏 써 제끼는 사회에 어느 누구도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언론조차도 겁먹었으니 더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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