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생활을 표현할 때 흔히 그 재미가 '깨 쏟아지듯 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왜 하필 깨일까? 깨 농사를 지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말을 실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깨알만 하다는 비유가 있듯이 깨의 알맹이 한 알 한 알은 크기가 아주 작다. 그래서 그것을 거둬들일 때도 무지막지하게 도리깨로 내리치는 타작과는 다르게 해야한다. 다발로 묶어 세워 바짝 말린 깨는 톡톡 치기만 해도 그 알들이 표현 그대로 솔솔 쏟아져 내린다. 그러면 모래 장난을 하던 때처럼 섬세하고 간지러운 촉감이 온몸으로 쏟아진다. 그것은 꽝하고 터지는 맛이 아니라 소리 소문 없이 은밀하게 지속적으로 감지되는 쾌감이다.
그러나 깨를 터는 재미만으로 그런 표현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음식 맛을 좌우하는 것이 양념이고 그 양념 맛을 좌우하는 것이 깨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남녀간의 사랑은 꿀 맛에 비유하여 서양 사람들은 숫제 '허니'라고도 부르지만 유독 우리만이 깨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깨소금이나 참기름 맛은 분명 꿀 맛, 설탕 맛과는 다르다. 겉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맛이 아니라 은근하게 입 안으로 배어드는 내향적인 맛이다. 밖으로 소리 내지 않고 혼자서 몰래 숨죽이고 웃는 웃음과도 같다. 그래서 '고소하다'거나 '깨소금 맛'이라고 하면 남의 불행을 즐기는 맛으로 그 뜻이 변해 버렸다. 라이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보다 좀 낫다 싶은 사람이 잘못되면 공연히 신이 나하고 밥맛이 돋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을 뒤집어놓은 말이 바로 이 '깨소금 맛'이기도 하다. 해학과 풍자 중에서 풍자에 해당하는 맛이 바로 깨소금 맛일 것 같다.
깨를 터는 맛이나 깨소금 맛은 농경 문화의 산물이다. 농경민들은 평생을 땅에 묶어서 지낸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행동 반경은 아침 해가 떠서 그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다. 그것이 농경 사회의 특성이다. 유목민들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은 멀리 외지로 나간다. 풀을 쫓아서, 상품을 구하고 팔기 위해서 미지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들은 토지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중국 대륙의 경우 농경족들이 항상 변두리의 유목민들에게 당하고 산 것은(그래서 만리장성이 생긴 것이다) 유목민들과 장사하는 사람들과는 그 공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때문이다. 농경민들은 한 공간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유목민과 장사하는 사람들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곧 삶의 수단이었다. 실제로 실크로드의 경우처럼 당시의 대상들은 중국에서 서역으로 왕래해야 했고, 그러자니 그 상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유목민들과 협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대상으로부터 부를 얻어 군비를 마련하고 고 그것을 힘으로 하여 농경족들을 공격할 수가 있었다.
반면 농민들은 유목민이나 상업민들과는 달리 그 경쟁 상대가 먼 바깥 세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논밭에 있는 이웃 사람들이었다. 가까운 사촌이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항상 자기와 키 재기를 하는 맞수가 된다. 그 인간 관계는 깨가 솔솔 쏟아지는 재미와 은근한 정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이웃의 불행을 즐기는 깨소금 맛, 고소한 맛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우리의 농업 인구는 7할이 넘었었지만 지금은 2학대 이하이다. 이렇게 급격한 산업화와 자유 시장으로 한국인의 심성이나 생활도 좋게 나쁘게 많이 변해 버렸다.삶의 맛도 다양해지고 고급화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이웃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고소한 맛, 깨소금 맛만은 우리의 의식 속에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배 아파하고 고소해야 할 상대는 우리의 사촌이 아닌 것이다. 사촌이 논을 샀거나 그 논이 장마에 떠내려간 것이 아니다. 시선을 넓은 바다 너머로 돌리고 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면 진짜 맛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맛이라야 기껏 깨소금 맛밖에 모르던 그 촌스런 사고에서 빨리 벗어나 세계와 경쟁해서 얻어지는 삶의 새 맛을 맛보아야 한다. 국제 경쟁은 경제를 위하여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와 그 의식의 개혁을 위해서도 꼭 거쳐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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