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라는 노랫말처럼 집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편아한 느낌을 준다. 사람이 사는 집만이 아니다. 집 안에 들어 있는 것이면 모두가 안정감을 준다. 시퍼런 칼날은 불안감을 주지만 칼집이라고 하면 걱정이 없다. 집은 칼날까지도 잠재우는 탁월한 편안함을 가지고 있다. 집은 '짓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집의 옛말은 '짓'이었다. 지아비, 지어미라고 할 때 붙어 다니는 그 '지'란 말 역시 '짓'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아비는 집의 아버지이며 지어미는 집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집의 어원을 생각하면 집의 근원적인 의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단순하게 집은 짓는 것이다. 농사를 짓고, 밥을 짓고, 옷을 짓고, 글을 짓고. 모든 것을 짓는 바로 창조의 근원이 집인 것이다.
"초가삼간 집을 짓고 천년 만년 살고 지고"
라는 옛날 민요도 있듯이 짓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요, 산다는 것은 곧 짓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분야에서든 무엇인가를 창조해 낸 사람들에게 집 가(家) 자를 붙여주는 것도 이런 문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음악을 지은 사람은 음악가이고 그림을 그리는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술가이다. 숫제 글을 짓는 소설가들에게는 그냥 작가(作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소설가가 직업란에 '작가'라고 썼더니 집 짓는 목수냐고 묻더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예술가들만이 아니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모두 이 집 가 자가 붙어 있다. 정치를 해서 이름을 얻고 기업을 일으켜 성공을 하면 정치가 기업가라는 호칭으로 부린다. 그리고 이러한 집들이 모여 가장 큰 집을 지은 것의 나라의 집, 바로 국가(國家)이다. 그래서 나라를 그냥 국(國)이라고 하지 않고 집 가자를 붙여 국가라고 한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이 집을 흔들어 붕괴시키는 마그네튜도 7도 가량의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이 지진의 진원지는 현대 문명의 중심인 미국이다. 출생률은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이혼율은 그 반을 넘었다. 여기에 동성애까지 합쳐 이른바 동성끼리 사는 신가족이라는 것이 등장하기도 한다. 어린애가 어린애를 키우는 소녀 미혼모 가족도 날로 불어간다. 인류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정 붕괴의 숫자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 경제의 쇠퇴와 사회 질서의 붕괴는 바로 이러한 숫자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부모의 이혼으로 홀어머니나 홀아비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실부모 밑에서자라는 아이보다여섯 배나 더 빈곤 속에 살 가능성이 많고 그 기한도 길다. 고교 중퇴자, 10대 미혼모, 마약과 범죄율도 결손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쪽이 두 배 내지 세 배가 넘는다고 한다. 정상적인 가족에서 자라지 못하고 부모가 세 번, 네 번 결혼하여 이러저리 끌려 다녀야 하는 아이들은 정신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런 원인으로 입원한 아동의 수는 점차 증가해서 1980년에 8만 1천 5백 건이었던 것이 6년 뒤에는 11만 2천 건으로 폭등했다고 한다. 10대의 자살 건수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원인이 바로 아버지의 부재라고 한다.
미국 사회의 이혼 찬미와 가정 탈출의 현실은 미국의 건국 이념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더러 있다고 한다. 미국 문화는 가정을 창조의 원형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로 보는 듯하다.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창조의 길이 된다는 것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정신을 가족으로까지 확대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정이란 부패한 과거 권력의 남용, 개인 자유의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가족을 파괴하는 것은 구세계의 압제로부터 독립하는 것과 같다. 개인은 가족의 속박에서 해방됨으로써 독립을 얻고 새로운 출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경험할 수가 있다. 요컨대 가족 파괴는 미국의 독립 정신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놀랄 일이 아니다. 학자들의 이러한 분석 이전에 이미 미국 문학은 가정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들이 미시시피 강을 자유롭게 떠내려가는 허클베리 핀의 뗏목을 고전으로 삼고 있다. 돌아갈 집이 없음을 서러워하는 고구려 때의 유리왕(황조가)으로부터 시작하여 달나라에 초가삼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 지고라는 우리네 민요에 이르기까지 가족 지상주의의 한국 문화 전통과는 완전 딴판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각자가 욕심껏 일하게 되면 사회를 윤택하게 하는 자본주의 시장이 구축된다고 말한 애덤 스미스조차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확실히 자신의 기쁨이나 고통에 대해서 가장 민감한 이기주의자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가족에 대한 이타(利他)의 정이 없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이기주의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 원리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 것이 가족 집단이라는 것을 애덤 스미스도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큰 회사를 경영하여 성공을 거둔 기업가들이 몇 명 안 되는 가족을 경영하는 데는 실패자가 되는 경우를 수없이 지켜봐 왔다. 하루 여덟 시간만 근무하면 되는 곳이 회사라면 24시간 온종일 근무하고 있는 곳이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기주의보다 이타주의가 얼마나 어렵고 소중하고 아름다운가를 우리는 그 가족의 애정을 통해서 배우고 느끼게 된다. 가정의 붕괴 현상은 바로 그 애정과 이타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대한 이기주의의 시장이 가정까지도 지배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집이라는 한국말처럼, 집은 짓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의 집 짓기 놀이 도구처럼 금세 짓고 허물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또 아이들이 모래로 집을 짓고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 게 새집 다오."하며 네 집과 내 집을 바꾸자고 노래하는 것처럼 남의 것과 바꿀 수도 없는 아주 소중한 것이다. 피나는 노력과 오랜 시간 그리고 서로의 희생으로만 지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집인 것이다. 지어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집이다. 우리가 그 비참한 전쟁과 피난 생활의 어려움을 버티고 일어선 것, 누가 뭐라든 지구의 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한 그 기적은 바로 가족을 존중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지열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구 사회가 2, 3백 년 걸려서 치른 근대화를 불과 2, 30년 만에 해치운 그 고속에 비해서는 가족의 붕괴 현상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 편이다.
한백 연구 재단에서 한일 청년의 의식 조사를 한 결과를 보아도 우리 쪽이 일본보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자기 가족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은 일본이 35퍼센트,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 배가 넘는 77퍼센트이다. 하지만 자기는 가족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된다는 말에 긍정적 대답을 한 것은역전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19퍼센트에 비해 우리 한국은 54퍼센트나 된다. 집단주의 체질인 일본보다 개인주의가 강한 한국인의 성품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새로운 물결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특히나 2023년을 살아가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은 불과 10여 년전의 조사 결과를 무색하게 더 파편화되고 개인 이기주의화 되어 있다. 10대와 노인 인구의 자살률이 세계 1위라고 하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깊이 반성하고 성찰해서 가족이 튼튼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그럴 때 진짜 강한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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