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말

설거지의 어원자료 : 수습하고 정리하는 일

by 61녹산 2023. 9. 11.
반응형

설거지
설거지

 

 

우리나라 아내들은 남편들에 대해 불만이 많은 편이다. 왜냐하면 남편들이 가사일을 잘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권운동으로 가사분담을 하는 가정이 많이 늘어났다고 하나, 아직도 상당수 남편들이 부엌일을 하면 무엇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설거지 경우가 그렇다. 남자들은 숟가락을 놓으면 후닥닥 일어나 자기 일을 하게 된다. 반면 아내는 이를 꾸역꾸역 치워야 한다. 바로 ‘설거지’가 남았다. ‘설거지’, 어디서 온 말일까? 언뜻봐도 오늘 문제인 ‘설거지’는 한자에서 온 말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말 명사형 어미 중에 ‘지’ 자로 끝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원의 힌트가 단숨에 떠오르지 않는다. 자! 우리는 비가 막 올라치면 ‘비설거지’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가령

 

“비가 곧 쏟아질 것 같다. 비설거지좀 해라. 특히 빨래를 꼭 걷어야 한다.”

 

정도가 된다. 이는 설거지라는 단어가 꼭 음식을 치우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설거지에는 두 가지 설명구가 나온다. 사전은 설거지에 대해 ‘음식을 먹고 난 뒤 그릇 따위를 씻어서 치우는 일’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물건을 거두어 치우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이 부분에 오늘 문제의 정답이 들어 있다. 정답을 미리 말하면 설거지는 ‘수습하다’ 또는 ‘정리하다’ 뜻을 지닌 순우리말이다.

 

대부분의 사전들은 '설거지'를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로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설겆-'에 접미사 설거지'를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로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설겆-'에 접미사 '-이'가 붙어서 생긴 말이다. 그렇다면 '설겆-'은 무엇일까? 현대국어에서 '설겆다'는 쓰이지 않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던 15세기의 문헌에는 '설엊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설겆다'란 동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설엊다'는 '설겆다'의 '겆'의 'ᄀ'이 'ᄅ' 뒤에서 탈락하여 '설엊다'로 표기된 것이다. 이것이 원래부터 '설엊다'였으면 '설엊다'로 표기되지 않고 '서럿다'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ᄀ'이 없었으면 연철하여 표기하고, 'ᄀ'이 있었던 것이 탈락한 경우이면 연철하여 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엊다'는 '설다'와 '겆다'로 분석됨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겆-'은 무엇일까? 어떤 학자는 이 '겆-'은 원래 '걷다'(收)의 어간 '걷-'이 뒤에 접미사 '-이'가 와서 구개음화되어 '걷이'가 '거지'가 되어서 된 것이라고, 즉 '설걷이'가 '설거지'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설겆다'는 '설거더, 설거드니' 등으로 표기된 적이 없고, 또 구개음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설어젯더이다, 설어저, 설어주믈' 등으로 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겆다'라는 동사가 문헌에서 쓰인 예를 발견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 아마도 '설다'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설다'와만 통합되었던 유일 형태소였던 것 같다.


15세기에는 '설거지'는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 '설거지하다'란 동사도 있을 리가 없다. '설거지하다'에 대응되는 옛말은 '설엊다'였었는데, 18세기에 '설다'와 함께 사라지게 된다. 방언에는 아직도 이들 형태가 남아 있지만(설겆다 <전남: 목포, 진도>, 설다 <전남: 함평>, 설르다 <제주>), 표준어에서는 우연하게도 '설엊다'와 '설다'가 운명을 같이 한 것이다.


이의 명사형이 보이는 것은 19세기말이다. '설거지하다'가 생긴 것도 당연히 그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설거지하다'가 '수습하다, 정리하다'의 뜻으로는 쓰이지 않고 '음식을 먹고 난 후에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행위'만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수습하다, 정리하다'의 뜻은 한자어로 대치된 것으로 보인다.

 

비설거지
비설거지

 

간혹 일간지에 특정 단어의 어원에 대한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런 글이 올라오면 반갑고 한편으론 고마움에 한 걸음에 읽게 된다. 그런데 기대에 못 미치는 글이 대부분이어서 실망이 자못 크다. 최근에 읽은 '설거지'의 어원에 대한 글도 마찬가지여서 이번 기회에 바로잡고자 한다.

 

설거지를 '설'과 '걷이'이로 분석한 뒤, '설'을 한자 설(設 베풀 설)로, '걷이'를 '거두어들이기'로 보아 '잔치 자리나 제사상에 설(設)했던 것을 거두어들임'으로 해석하는 것이 대표적인 잘못된 분석이다. '설거지'를 거두어들이는 행위로 본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떤 근거로 잔칫상이나 제사상에 진설했던 것을 거두어들이는 행위로 파악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설거지'라는 단어의 역사적 정보에 무지하여 이러한 어설픈 해석이 나온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설거지'는 19세기 문헌에 처음 등장하며, 동사 '설겆다'에서 파생된 명사다. '설겆다'는 '설거지하다'에 밀려나 현재 표준어는 아니나 한동안 표준어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15세기 문헌에는 '설엊다'로 나오는데, 이는 '설겆다'에서 'ㄹ' 뒤의 'ㄱ'이 'ㅇ'으로 교체되는 어형이다. '설엊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설어지'가 있었으며, 제2음절에서 'ㅇ'이 소실된 '서러지'를 거쳐 제2음절의 모음이 달라진 '서르지'로 이어졌다.

 

동사 '설겆다'는 '설다'와 '겆다'가 결합된 합성어다. 중세국어 '설다'는 '수습하다, 치우다'의 뜻이다. 그런데 중세국어 '겆다'는 어떤 뜻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설다'와 같거나 그와 유사한 의미를 띠지 않았나 하여, '설겆다' 전체를 '수습하다, 정리하다'로 해석하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마침 '설겆다'에서 변한 중세국어 '설엊다'에서 이러한 의미와 함께 이것에서 파생된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식기를 씻어 정리하다'라는특수한 의미가 확인되어 이러한 추정에 힘을 얻는다. 아울러 '설엊다'에서 파생된 명사 '설어지'도 '치우거나 정리하는 일'과 '식기를 씻어 정리하는 일'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띠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어지'에 기원하는 '서러지, 서르지'는 한동안 쓰이다가 '설거지'에 밀려나 사라졌다. '서러지'는 현재 강원 방언에 남아 있다. '설거지'는 'ㄹ' 뒤에서 'ㄱ'이 'ㅇ'으로 약회되는 규칙이 사라지면서 '설엊다'에서 부활한 '설겆다'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말이다. 이는 동사 '설겆다'의 어간 '설겆-'에 접미사 '-이'가 결합된 형태로, 19세기 문헌에 처음 보이며, 이 또한 '치우거나 정리하는 일'과 '식기를 씻어 정리하는 일'이라는 그 본래의 의미를 유지했으나 현재 이와 같은 의미는 사라졌다

 

합성어 '비설거지(비를 피해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 '눈설거지(눈이 오려고 하거나 눈이 내릴 때 눈을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다른 곳으로 치우거나 덮개로 덮는 일)', '잔설거지(잔치를 끝내고 남은 음식을 먹어 치우는 일)', '갈설거지(가을걷이를 한 다음에 하는 뒷정리. 경북방언)' 등에서나 '설거지'의 본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새벽이슬 아롱진 울 밑 제비꽃 같았을 열아홉에 엄마는 우리집에 시집을 오셨다는데, 종가에 발을 ‘잘못’ 들인 뒤 넌더리가 날 만큼 한 게 있다 하셨다. 수십 명이 먹고 난 많은 그릇을 끼마다 씻고 말리는 설거지가 가장 더럽고 치사하고 뼈 빠지는 노역이었다고 하셨다.

열두 달을 찬물로 세수, 빨래, 설거지를 하던 전방생활이 아직 아찔하다. 두셋이서 하루 세끼 부대원 숟갈 30여 개와 플라스틱 식판 30여 개를 스펀지에 빨랫비누 묻혀 닦는 일을 몇 달 하던 때가 있었다. 한겨울 뻘건 돼지찌개 같은 반찬이 나온 날은 참으로 큰 낭패였다. 청결과는 당초 거리가 먼 설거지였지만 어디가 아프다고 한 사람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설거지’는 ‘커튼을 걷다’ ‘소매를 걷다’처럼 늘어진 걸 말아 올리거나 열어젖히다, 또 ‘빨래를 걷다’ ‘돗자리를 걷다’같이 널거나 깐 것을 딴 데로 치우거나 한 곳에 둔다는 뜻을 가진 옛말 ‘설엊다’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설엊’이 발음 편의상 ‘설겆’으로 변하고 행위를 이르는 ‘이’가 붙어 ‘설겆이’로 쓰이다 ‘설거지’로 연음 돼 표준어가 됐습니다. 이북에서는 지금도 ‘설겆이’라고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