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처럼 '죽는다'는 말을 잘 쓰는 사람도 없다고들 한다. 그러는 사람 자신도 무엇인가 좀 힘주어 말하려고 할 때에는 저도 모르게 '죽는다'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인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비비며 첫마디가 '졸려 죽겠다'이고 저녁 때 집으로 돌아와 서류 가방을 내던지며 하는 소리가 '피곤해 죽겠다'이다. 죽겠다는 말에서 해가 뜨고 죽겠다는 말로 해가 진다. 미운 놈은 언제나 죽일 놈이고 반대할 때는 언제나 결사반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밉고 슬프고 외로울 때만 죽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을 때도 좋아 죽겠고 기쁠 때에도 기뻐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헤어지면 '보고 싶어서 죽겠고', 만나면 또 '반가워서 죽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전천후의 죽겠다 문화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진정한 본모습이다. 심지어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
는 표현을 쓴다.
감정 표현만이 아니다. 생명 없는 물건들을 놓고서도 죽는다는 말을 잘 쓴다. 풀이 죽고 시계가 죽고 맛이 죽는다. 문명의 첨단, 컴퓨터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다운되었을 때에도 토막이말로 죽었다고 한다.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그나마 낫다. 아이나 어른이나 조금만 화가 나도 아주 쉽게 죽여버린다는 말을 한다. 물론 정말 죽일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입에 밴 말이다. 그러나 외국에 가면 사정이 다르다. 만약에 부부싸움을 할 때 한국처럼 죽인다는 말을 했다가는 살인 미수죄가 된다.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죽인다는 말이 그렇게 살벌한 게 아니다. 지극히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장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소리가 좀 크면 볼륨을 죽이라고 하는 멋있는 장면이 나오면 죽여준다고 한다. 바둑이든 장기든 한국인이 모여 노는 자리에 가면 죽고 죽이는 것이 기본이다.
이렇게 죽는다는 말을 잘 쓰는 것이 과연 흉인가? 서양 문명의 쇠퇴는 시체를 아름답게 화장하고 아이들에게 시신을 숨기는 데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풀이하는 문명가도 있는 듯 하다. 이미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죽음에 무관심해진 서구 사회에 대해서 깊은 우려와 경고를 던지고 있다. 죽음의 처절성과 그 끔찍함을 외면하려고 할 때 그 문화는 세속화에 젖어 안이한 쾌락에만 젖는다. 그리고 죽음에 직면하여 그것을 생 속에 끌어들이려는 정신을 잃었을 때 오히려 그 문화와 문명은 생명력마저 잃게 된다.
한국 사람들은 말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죽음은 슬픈 것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상집에서는 반드시 울음소리가 들려야만 한다. 희랍에서는 남자들이 울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 관습으로 친척이 죽으면 여성들이 대신 장의의 주역이 되어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세에 올수록 눈물은 없어지고 죽음은 종교화하여 미화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장례식의 울음을 양식화하여 이를테면 문화적인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 놓았다. 곡이라는 것이 이를 대표한다.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울면 상주요, "어이 어이"하고 울면 문상객이 된다. 심지어 곡할 사람이 없으면 곡꾼을 사서 울렸다. 중국에도 물론 그런 제도가 있어 지방이나 시대에 따라서는 죽음을 기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일부 노토(能登 : 능등) 지방에서는 곡을 하는 풍습이 있고 쌀을 받고 울어주는 곡파(哭婆:곡파)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상업의 나라 일본답게 보수로 받는 쌀의 양에 따라서 그 울어주는 것이 달라졌는데, 한 말을 주면 한 말 곡, 두 말을 주면 두 말 곡으로 말수에 따라서 우는 시간과 목청이 달라진다. 여러 가지 비교를 통해서 볼 때 곡 문화에 있어서만은 어떤 민족도 한국을 따라 올 수가 없다. 또한 죽음은 흉사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 화장을 시키고 산 사람처럼 꾸민다. 진짜 죽음의 모습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의 경우 장례식에 사용되는 것은 혐오감과 두려움과 흉측한 인상을 주는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베옷은 거칠고 널 역시 거칠다. 상여가 아름답기는 하나 칠성판은 장식이 되어 있지 않은 널빤지이며 상두의 노래는 처절하고 애절하다.
한국인이 죽음이라는 말을 잘 쓴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해 그만큼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생은 전부 가짜 보석이다. 죽음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 남은 다 죽어도 자기 혼자만은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아침 이슬과 물거품의 허상 속에 매달려 산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이 와도 여전히 남는 단단한 삶의 가치를 얻기 위해 애쓰게 된다. 어리석은 자는 항상 삶 다음에 죽음이 오지만 현명한 사람은 죽음 다음에 삶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생사결단'한다고 하지 않고 '사생결단'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과 죽음의 순서를 뒤집어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직역을 해서는 안 된다. 자연스러운 한국말이 되자면 그 순서를 바꿔야만 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해야 한국적인 것이 된다.
인생을 옛 한국말로는 '죽살이(죽고 사는 것)'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죽음을 생보다 앞세우는 철학적 표현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실의 그 달콤한 과육은 생에 바쳐지는 것이지만 그 속에 묻혀 있는 딱딱한 씨는 죽음에 바쳐지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희생을 하며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도 바로 자신의 죽음에 대비하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치 웅녀가 죽음의 깜깜한 굴 속에서 神市(신시)의 아침 햇살을 맞이한 것처럼 말끝마다 죽는다고 말한 그 입술에서 '살다'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 그것은 새벽바람처럼 참신함이 느껴진다. '살다'라는 한국말이 아름답고 싱싱하게 들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얼다에 '음'을 붙인 것이 '얼음'이듯이 살다에 '암'을 붙여 명사형으로 만든 말이 바로 사람이 된다.
죽음이란 말 못지않게 우리는 살다라는 말을 참 많이 쓴다. 미술가들은 그림을 보면서 선이 살아 있다고 감탄하고, 법조인들은 사회 질서가 바로 잡혀 있는 것을 보면 법이 살아 있다고 자긍심을 느낀다. 기업인들은 어떤가?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학자들은 진리를 살리기 위해서 일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살림살이를 위해서 땀을 흘린다. 살림살이라는 말에는 살다와 관계된 말이 두 개씩이나 합쳐져 있다. 외국 말 중에 '살다'라는 말을 겹쳐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낸 복합어를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마저 이야기 해 보면 우리 민족의 가슴을 울린 노래에는 대개가 다 '살다'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애 살어리랏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가 바로 그 예이다. '왜 사냐면 웃지요'와 같은 웃음이 아니면 '한 5백 년 살자는데'라고 길게 길게 뻗치는 민요의 한 자락과도 같다. 재즈와 같은 숨 가쁜 쾌락만이 깃들어 있는 노래가 아니다. 이 두 개의 리듬을 타고 우리 한국인들은 생활을 살아왔다 삶이란 생 하나만으로 굴러갈 수 있는 수레가 아니다. 죽음과 삶의 두 바퀴가 있을 때 비로소 굴러가는 수레가 완성된다.
헌데, 지금 우리가 가장 많이 잃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이다. 죽음이 배제된 문명 속에서는 생명 존중의 싹이 자랄 수가 없다. 그림자 없는 빛처럼 삶은 그 입체성을 상실하고 단순화한다. 그래서 지금 서양이나 일본 같은 데서는 <죽음의 서>와 같은 고리타분한 옛 문헌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현상까지 난리법석이다. 그리고 몇몇 대학에서는 死學(사학)이라는 신학문이 설치되어 관심을 모으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말끝마다 죽음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살아왔던 한국인들은 장례식장으로 둔갑한 병원 영안실 풍경을 가보는 것만으로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은 막장의 허드레 배추처럼 버려지고 있는 아프디 아픈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곡성조차 들을 수 없게 된 죽음, 눈물도 경건함도 없는 죽음, 근대문명이 우리에게 안겨준 바로 그 종착역은 삶이 뒤따르지 않는 죽음뿐이다.
"비참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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