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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억새_어원자료

by 61녹산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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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가을 억새


 

 

11월을 맞이하는 첫 번째 주말 언저리에 제법 쌀쌀한 날씨에 산 바람을 맞으며 가족들이 제주도 애월의 새별 오름에 올랐다. 오름(산)의 비탈을 타고 내린, 햇솜처럼 부풀어 오른 은빛 억새가 파도처럼 출렁이는 모습이 창관을 이루웠다. 그야말로 억새의 바다였다. 바람에 실려 오는 억새만의 특유의 짠맛 나는 풀냄새를 맡고 서 있다 보니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청명(淸明)해졌다.

 

현재 제주에는 억새를 어웍 또는 어웍새라고 한다. 어웍새가 17세기 말의 <역어유해 1690>에 나오고 있어 제주어가 얼마나 우리말의 원형을 잘 보관하고 있는지 이로써도 실감할 수 있다. 어웍새는 어웍과 새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어웍의 어원은 알기 어렵다. 다만 경상 방언에 억새가 어벅새로 나타나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어웍은 어벅에서 변한 어형이지 않을가 싶다. 어벅새가 어벅새(ㅂ순경음)을 거쳐 어웍새로 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변화과정이다. 

 

어웍새의 새는 풀[草]의 뜻인 것이 분명하다. 풀이름 기름새, 나래새, 솔새, 오리새 등에 보이는 새 또한 그러한 것이다. 새는 띠억새와 같은 볏과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새 잎에 눈 다치랴"

 

에서 보듯 새가 속담에도 이용된 것을 보면 한때 흔히 쓰이던 말이었음을 알 수있다. 이 속담은 새(풀) 잎에 귀한 눈을 다칠 리 없다는 뜻으로, 하찮은 것에 해를 입을 리 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지금 새는 단독으로 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앞에 제시한 기름새, 나래새 등과 같은 특정 풀이름에나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세력을 잃고 사어에 가깝게 되었다. 물론 새별오름에 보이는 새까지 풀의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의 새는 동(東)의 뜻이어서 새별은 새벽녘 동쪽에서 뜨는 별, 곧 금성(金星)을 가리키며 현재는 사이시옷이 들어간 샛별로 표기한다.

 

어웍새의 새가 풀의 뜻이므로 그 앞에 붙은 어웍은 일반 풀과 억새와의 차이를 드러내는 변별 요소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기 어렵다. 제주 방언 어웍에서 보듯 본래 어웍 자체가 억새를 지시했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어웍새의 새는 어웍이 풀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요소가 된다. 

 

17세기의 어웍새 어욱새, 웍새를 거쳐 억새로 변한다. 억새가 19세기 문헌에 등장한다. 억새의 줄기가 억세다는 점에 이끌려 억새를 억세다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하나, 그 이전 어형들을 고려하면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현대국어에서는 억새 이외에 억새풀이라는 단어도 쓰인다. 이는 억새에 새와 같은 의미가 같은 풀을 덧붙인 동의 중복형 합성어다. 고유어 새가 풀을 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억새가 풀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억새에 풀을 덧붙인 겹말이다. 억새가 무성한 곳이 억새밭이며, 억새밭보다 더 우거진 곳이 억새숲이다. 

 

 

 

고복수의 짝사랑

 

 

 

한편, 원로 가수 ‘고복수’ 선생이 부른 ‘짝사랑’(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그 첫머리는 “아~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한다. ‘으악새가 아주 구슬프게 울어대는 것을 보니 벌써 가을이 온 것이 아니냐’는 애절한 심정을 담고 있는 가사이다. 이 노래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이 노랫말을 읊조리며 깊은 상념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이 노래를 애창하는 사람들도 정작 ‘으악새’가 어떤 새인지 잘 모른다. ‘으악새’가 어떤 새냐고 물으면 그저 ‘으악, 으악’ 우는 새가 아니냐고 반문하기만 한다. 새 이름에는 그 울음소리를 흉내낸 의성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으악새’를 ‘으악, 으악’ 하고 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는 것도 크게 잘못은 아니다. ‘뻐꾹, 뻐꾹’ 울어서 ‘뻐꾹새’이고, ‘종달, 종달’ 울어서 ‘종달새’가 아닌가.


문제는 그러한 새를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으악, 으악’ 하면서 우는 새를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흔든다. ‘으악새’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으악새’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생소하다.

 

그래서 이 노래에 나오는 ‘으악새’를 새 이름이 아니라 풀이름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사실 필자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으악새’가 포함하는 ‘새’가 ‘풀’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실제 ‘으악새’가 ‘억새’라는 풀의 경기 방언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 그 강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으악새’를 ‘억새’로 보는 사람들은 “으악새 슬피 우는”이라는 구절을, 억새가 가을바람에 물결치듯 흔들릴 때 우는 듯한 마찰음이 나는
데 그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설명한다. 억새가 소슬바람에 스치는 소리는 정말로 스산하고 처량하다. 그래서 그 소리를 얼마든지 풀이 우는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 표준어인 ‘억새’가 아니라 방언인 ‘으악새’로 표현한 것은 노래의 가락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시적(詩的) 해석으로 말미암아 이 노래는 더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데 정작 이 노래 속의 ‘으악새’가 ‘억새’라는 풀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일 뿐이니 어찌하랴. 이 노래의 작사자는 노랫말을 쓴 배경을 설명하면서 ‘으악새’를 뒷동산에 올라가 보니 멀리서 ‘으악, 으악’ 우는 새의 소리가 들려 붙인 이름으로 설명한다. 그럼 이 ‘으악, 으악’ 울던 새는 어떤 새였을까? 딱히 그 새의 종류를 말할 수는 없지만 ‘왜가리’였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지역에서 ‘왜가리’를 ‘으악새’니, ‘왁새’니 하기 때문이다. ‘왜가리’의 울음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으악, 으악’으로 들릴 수도 있고, ‘왁, 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으악, 으악’ 우는 소리를 근거로 ‘으악새’라는 명칭이 만들어지고, ‘왁, 왁’ 우는 소리를 근거로 ‘왁새’나 ‘왜가리’라는 명칭이 만들어질 수 있다. ‘으악, 으악’ 우는 소리와 ‘왁, 왁’ 우는 소리는 그렇게 다른 소리가 아니다. ‘왜가리’라는 새의 울음소리를 지역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들을 수 있다면 ‘으악새’니, ‘왁새’니, ‘왜가리’니 하는 서로 다른 명칭이 나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래 속에 나오는 ‘으악새’가 새 이름이라는 사실은 그 노래의 제2절을 들어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제2절은 “아~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한다. ‘으악새’와 대응되는 ‘뜸북새’가 조류 이름이기에 그에 대응되는 ‘으악새’ 또한 조류 이름인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는 ‘으악새라는 새가 슬피 울어대니 가을이 아닌가요’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으악새’를 ‘억새’로 풀이할 때의 시적 이미지는 싹 가신다. 그러나  ‘으악새’는 풀이 아니라 새이기 때문에 전혀 타당한 견해로 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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