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는 전구를 불알이라고 한다던데 맞아?"
"너 그것도 몰라? 북한에서는 한자말이나 왜리어는 잘 안 쓰고 우리말로 바꿔 부르잖아."
"그럼 형광등은 뭐라 그래?"
"그거야 긴불알이지."
"썅들리에는?"
"떼불알."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겠지만 이런 얘기가 한때 그럴 듯하게 퍼진 적이 있다. 골키퍼를 '문지기', 코너킥을 '구석차기'로 다듬어 쓰는 북한을 두고 이를 과장해 지어낸 것이다. 광복 이후 반세기가 넘게 떨어져 살다 보니 북한의 말이 우리와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닭알공기찜, 게사니구이, 남새튀김, 배밤채, 기장밥
2007년 남북 정상회담차 평양을 다녀온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 기간에 북에서 맛본 음식 이름들이다. 알 듯 말 듯한 이런 이름이 정상회담 내내 남쪽에서 화제에 오른 까닭은 이들이 남북한의 달라진 말의 차이를 단적으로, 그리고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 단연 주목을 받은 것은 게사니구이였다. '게사니구이'는 수육과 비슷한 요리로 알려졌는데, 수육은 삶아 익힌 쇠고기를 말한다. 이 수육은 본래 숙육(熟肉)에서 온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받침이 떨어져 나가 수육으로 굳어진 것이다. '게사니'는 강원, 경기, 함경 지역에서 쓰이는, 거위의 방언이다. 북한에서는 게사니가 표준어 즉 북한의 문화어이고 날짐승 이름으로서의 거위란 말은 쓰지 않는다. 특이한 건 북한에도 거위란 단어가 있긴 한데 이는 '회충'을 뜻하는 말이다. 회충(蛔蟲)의 본래 우리 고유어가 '거위'이다. 남에서는 거의 사어화한 이 말이 북에서는 오히려 회충을 대신하는 표준어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북한에서는 회충이란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여러 차례 말 다듬기를 통해 한자어인 회충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에 회충이 있어 소화가 안 되고 식욕도 없으며 점점 야위어 가는 병을 가리켜 '거위배앓이'라고 한다. 그러니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혹여 실수로라도
"거위구위를 먹는다"
라고 한다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만한 일이다.
'닭알공기찜'은 남한의 계란찜 같은 것으로 알려졌다. 닭알은 달걀 또는 계란의 북한어이다. 북에서는 달걀이나 계란은 공식적으로 쓰지 않는다. 물론 사전에 올림말로 소개돼 있긴 하지만 둘다 버리고 닭알만을 표준어로 채택했다.
북한에서 '남새'는 '배추, 무, 오이, 가지, 파 마늘, 호박 따위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우리말의 야채(野菜)나 채소(菜蔬)와 같다. 남쪽에도 '남새'란 말이 남아 있지만 실생활에서 거의 쓰지 않는 반면 북에서는 표준어이다. 이에 비해 야채나 채소는 역시 한자말이란 이유로 버렸다. 북한 사회과학출판사에서 펴낸 <조선말대사전>에는 이들 말이 단어로 올라 있긴 하지만 쓰지 않는 말로 처리돼 있다.
앞그루작물가을, 날치기참호대사격, 고정판동시물에뛰여들기, 뜨락또르, 따쥐끼스딴
무슨 뜻인지 알듯 모를 듯 암호 같은 이 말들은 북한의 초, 중등 교과서나 <로동신문> 등에서 실제로 쓰고 있는, 북에서는 일상적인 단어들이다. 그렇다고 남한 사람들에게도 전혀 낯선 말은 아니다. 다만 일부 외래어 표기를 제외하곤 잘 쓰이지 않기에 우리에겐 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앞그루'는 그루갈이를 할 때 먼저 재배하는 농작물을 뜻한다. 한자어로는 '전작(前作)'이라 한다. '그루갈이'란 무엇일까? 그루갈이는 '한 해에 같은 땅에서 두 번 농사짓는 일, 또는 그렇게 지은 농사'를 말한다. 한자어로 하면 이모작(二毛作)이다. 논에서는 보통 여름에 벼, 가을에 보리나 밀을 심어 가꾼다. 그러니 앞그루 작물이란 이모작에서 먼저 짓는 작물, 즉 전작물이다.
그러면 '앞그루작물가을'은 무엇일까? '가을'은 여기서 계절이 아니라 바로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것을 말한다. 남에서는 사전적으로만 남아 있는 형편이고,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라져 가는 말이지만 북한에서는 살려 쓰고 있다. 우리는 '수확'이라고 해야 금방 알아듣는다. 따라서 앞그루작물가을이란 '이모작에서 먼저 지은 작물을 수확'하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점은 북에서 쓰는 이런 말들이 남한에서 역시 특이한 단어들이 아니란 것이다. 남에서도 어엿한 단어로 존재하며 사전에도 다 올라 있다. 다만 오랫동안 우리가 잘 안 써서 낯설게 보일 뿐이다.
'날치기참호대사격'은 사격의 한 종목으로 우리는 클레이 트랩이라고 부른다. '고정판동시물에뛰여들기'는 수영의 플랫폼 싱크로나이즈드를 가리킨다. '뜨락또르'나 '따쥐끼스딴'은 얼추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각각 트랙터, 타지키스탄의 북한식 표기이다. 우리는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해 적지만 북한에서는 러시아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학령전녀자아이들이 흔히 입는 달린옷의 한 가지. 이 나이 아이들의 신체적특성을 고려하여 가슴아래부분이 몸에 붙지 않고 허리선이 없게 만든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 나오는 이 풀이를 남한 사람들이 본다면 얼마나 이해할까? 짧은 두 문장으로 되어 있는 이 설명문에는 남한 말과 다른 북한 말의 몇 가지 특징이 잘 담겨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학령전녀자아이들', '신체적특성', '가슴아래부분' 등에서 보이는 띄어쓰기 방식이다. 남한 식으로 다시 쓰면 '학령 전 여자이들, 신체적 특성, 가슴 아래 부분'이다. '학령'이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를 뜻하는데 이는 남북한이 같이 쓴느 말이다. 남한에서는 단어를 기준으로 띄어스기를 철저히 적용하는 반면 북한에서는 원칙은 같지만 우리보다 붙여 쓰는 경우가 훨씬 많다. 명사가 나열되거나 관형어의 수식을 받는 꼴이더라도 의미상 한 덩어리로 묶일 수 있다면 모두 붙여 쓰기 때문이다.
'달린옷'은 원피스를 다듬은 말이다. 북한에서는 광복 이후 궁극적으로 한자 폐지를 염두에 두고 한자어의 우리말 순화작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왔다. 외래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러 차례 소위 '다듬은 말'을 내놓으면서 손질을 더해 1986년 최종적인 다듬은 말 2만 5000여 개를 공포해 써 오고 있다. 달린옷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면 전체 풀이가 나타내는 단어는 무엇일까? 답은 '나리옷'이다. 이 역시 다듬은 말인데 우리의 '드레스'에 해당한다.
하지만 북한의 다듬은 말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다. 대표적인게 '얼음보숭이'다. 아직도 북한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 하는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북한에서는 한때 얼음보숭이를 쓰도록 정책적으로 장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1992년 펴낸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얼음보숭이를 버리고 아이스크림을 표준어로 올렸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외래어 순화가 매우 어려운 일이란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 앞서 소개한 전구는 북에서 '전등알'로 쓴다. 형광등은 남북이 같고 샹들리에는 북에서 '샨데리야(다음은 말로 장식등)'로 다르게 적는다. 노크를 '손기척'으로 바꿔 부르는 것도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이처럼 남북한 말의 차이는 대개 단어 사용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다. 북한의 달라진 말을 단순히 호기심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언젠가 이뤄 내야 할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선 남북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쓰는 우리말과 글을 통해 다져 가는게 가장 빠른 길이다.
<제법 재미있는 북한말 몇 가지>
가급금 > 상여금
가루젖 > 분유
거위 > 회충
게사니 > 거위
과일단물 > 주스
곽밥 > 도시락
글장님 > 문맹자
끌신 > 슬리퍼
나리옷 > 드레스
나사틀개 > 스패너
냄내다 > 배웅하다
눈썹먹 > 마스카라
단물약 > 시럽
달린옷 > 원피스
달못찬아이 > 미숙아
동거살이 > 셋방살이
따기군 > 소매치기
뜨게부부 > 사실혼
몸틀 > 마네킹
배움나들이 > 수학여행
비행안내원 > 스튜어디스
살물결 > 스킨로션
색동다리 > 무지개
손전화 > 휴대폰
아고 > 시어머니
오림책 > 스크랩북
원주필 > 볼펜
전망식당 > 스카이 라운지
주머니종 > 무선 호출기
집난이 > 시집간 딸
찔게 > 반찬
하루살이 양말 > 스타킹
해방처녀 > 미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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