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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줄행랑의 어원자료 : 줄지어 있는 행랑에서 도망으로

by 61녹산 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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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행랑
줄행랑

 

흔히 어떤 낌새를 채고 자리를 급히 피할 때 ‘36계 줄행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어디서 온 말일까? 오늘의 문제는 보기보다 복잡한 언어구조를 띠고 있다. 순우리말과 한자를 넘나들고 한국과 중국을 바쁘게 오가야 한다.

 

먼저 ‘병법 36계’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의 저자를 중국 손자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도 작자미상으로 돼 있다. 그러나 36계는 중국병서에서 유래한 것은 맞다. 흔히 쓰는 표현인 ‘성동격서’, ‘미인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 등도 모두 36계에서 온 표현이다, 36계 중 ‘성동격서’는 6계, ‘미인계'는 30계, ‘굴러온 돌’은 31계에 위치하고 있다. 


36계는 글자 그대로 맨 마지막, 즉 36번째에 위치하는 전술이다. 그러나 이의 본래 표현은 ‘36계 주위상’(走爲上) 이다. 불리하면 일단 후퇴해,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이다. 원문 ‘36계 주위상’이 지금은 ‘36계 줄행랑’으로 변해 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을 펴볼 필요가 있다. 사전은 ‘줄행랑’에 대해 ‘도망하다의 속된 말'이라는 설명과 함께 괄호 안에 ‘-行廊’이라고 써놓고 있다. 여기서의 ‘行廊’은 대문 옆에 있는 방으로 조선시대 때 종들이 주로 쓰던 방이다.


따라서 ‘줄행랑’을 글자 그대로 풀면 ‘행랑채로 도망하다’ 정도가 된다. 정황상 안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 종이 행랑으로 도망한 것 쯤으로 볼 수 있다. 국어학자들은 ‘36계 주위상’이라는 뜻이 어렵자, 순우리말 표현인 ‘줄행랑’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우리말 ‘줄달음’이라는 표현에서도 지원을 얻고 있다. 이는 ‘단숨에 내쳐 달리는 것’을 말한다. ‘줄달음’의 앞말 ‘줄’은 여기서 온 것으로 보이고 있다.

 

줄행랑
줄행랑

 

사전에서는 '줄행랑'을 '대문의 좌우로 죽 벌여 있는 종의 방'과 '도망'을 속되게 이르는 말의 두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첫 번째가 그 본래의 의미다. 그런데 두 번째 '도망'이라는 의미는 첫 번째 '종의 방'이라는 의미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이것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의미인지 매우 흥미를 자극한다.

 

'줄행랑'은 '줄'과 '행랑(行廊'이 결합된 합성어여서 '줄을 지어 있는,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이라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솟을대문(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이 있는 큰 기와집을 생각하면 대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줄행랑의 모습이 쉽게 연상될 것이다. 줄행랑에는 주로 그 집에 딸린 종들이 거처했기에 첫 번째와 같은 의미가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길게 줄지어 있는 행랑이 '줄행랑'이라면, 달랑 하나뿐인 행랑은 '단행랑(單行廊)'이다. '단행랑'은 그 어느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으나

 

"줄행랑 집을 팔아 단행랑 집을 사고 단행랑 집을 또 팔게 되자 더 적은 집엔 들 수 업다 하야" <현진건 지새는 안개 1923>

 

에서 보듯 '줄행랑'의 대응 개념으로 실제 쓰이던 말이다. 현재는 아쉽게도 북한어로 분류되어 있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자취를 감췄지만 우리 사전에 올려야 할 단어임에 틀림없다.

 

행랑을 죽 이어서 쌓는 것을 보통 '줄행랑을 치다'라고 표현한다. 여기서의 '치다'는 '담을 치다'의 그것과 같이 '벽 따위를 둘러서 세우거나 쌓다'의 뜻이다. 그런데 '줄행랑을 치다'는 그 본래의 의미를 넘어 '피하여 달아나다'는 관용적 의미를 띠게 된다. 행랑을 길게 치는 것이 꽁무니를 뺀 채 줄달음질을 치는 것과 같아 보여 '줄행랑을 치다'에 이러한 관용적 의미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줄행랑을 치다'는 목적격 조사 '을'이 생략되어 '줄행랑치다'로 어휘화하기도 한다.

 

'줄행랑'이 갖는 '도망'이라는 의미는 '줄행랑을 치다'가 갖는 피하여 달아나다라는 관용적 의미를 통하여 나온 것이다. 곧 관용구의 한 요소인 '줄행랑'이 관용구 전체의 의미에 영향을 받아 '도망'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얻은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줄행랑'은 '줄걸음'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우리가 잘 아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위험이 닥쳐 몸을 피해야 할 때는 싸우거나 다른 계책을 세우기보다는 우선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

 

이라는 속담 속의 '줄행랑'도 '도망'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로써 '줄행랑'이 지니는 '도망'이라는 의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인지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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