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됐을 때 흔히 '이판사판'이라고 한다.
"에이, 이판사판이다"
고 하면 결과야 어찌 됐든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체념적 의지를 표시한다. 도박판에서 번번이 잃다 마지막 판돈을 걸 때는 이판사판의 심정이 된다. 이래저래 별로 우아한 단어는 아니다.
이판사판은 원래 불교 용어에서 유래됐다. 이판(理判)은 이판승을 가리키는 말로 참선, 수도, 포교 등 불교의 이치를 탐구하는 스님을 뜻한다. 이판승은 공부승이라고도 한다. 또 사판(事判)은 사판승, 즉 사찰의 행정 업무나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스님을 말한다. 이판승과 사판승은 수레의 양 바퀴처럼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종단의 운영과 유지가 어렵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이를 널리 펴는 것과 동시에 사찰이나 종단의 조직을 잘 관리해 불법을 유지, 전승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그 의미가 엉뚱하게 바뀐 것은 조선시대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스님은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게 됐다. 당시 스님이 된다는 것은 신분이 가장 낮은 계층으로 추락한다는 뜻이 된다. 속된 말로 인생이 끝장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이판승과 사판승을 통칭하던 이판사판은 '막다른 궁지' 또는 '끝장'을 가리키거나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이판과 현실을 고려하는 사판이 대립할 경우 화해나 절충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끝까지 싸우는 걸 두고 나온 말이 이판사판이라는 것이다. 물론 불교계는 이런 해석을 부정한다.
어쨌든 요즘 이판사판은 갈등과 대립의 상황에서 더 많이 쓰이는 말이 돼버렸다. 정쟁은 한 번 불붙으면 대개 이판사판으로 치닫는다. 단결을 생명처럼 여기던 노동계도 내분이 일어나면 이판사판이다. 심지어 차분해야 할 한일 외교도 서로 이판사판이다. 화해나 절충의 길이 안 보인다. 불교에선 이판이 있으므로 사판이 있고, 사판이 있으므로 이판이 있다고 본다. 둘은 본질적으론 하나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판사판에는 화합과 상생의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말의 근본마저 변질되고 만 것은 뭐든지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중생의 옹졸함 탓이 아닐까.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판사(判事)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의 제목이나 법조인이 개설한 익명의 카페 이름에까지 마구 쓰이고 있어 생뚱맞다. '이판사판'의 둘째 음절과 셋째 음절을 취하면 '판사'가 된다는 점을 재빨리 간파하고 조금은 자극적인 이판사판을 끌어들여 드라마 제목이나 카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재치 있는 언어유희(言語遊戱)이지만, '이판사판'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판사'와 같이 점잖은 분들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판사판'은 불교 용어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결합된 말이다. '이판'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도를 닦는 일을 뜻하며,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하는 스님을 '이판승, 이판중, 공부승'이라 한다. '사판'은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일을 뜻하며,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스님을 '사판승, 사판중, 산림중'이라고 한다. '이판'이 있어야 부처의 지혜 광명이 이어지고, 사판이 있어야 가람(절)이 운영되므로 '이판'과 '사판'은 세속화하면 절간에 꼴사나운 일이 벌어진다.
'이판사판'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는 '이판'과 '사판'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와 사뭇 동떨어져 있어 특이하다. 이와 같은 의미가 어떻게 불교 용어 '이판'과 '사판'의 의미를 통해 생성될 수 있었는지 대단히 궁금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은 그렇게 신통하지 못하다.
전하기를, 조선 시대에 스님은 최하위 신분 계층이라서 이판이든 사판이든 스님이 되는 길은 인생의 끝이었기에 '이판사판'에 '마지막 긍지' 또는 '끝장'이라는 극단적 의미가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이판승과 사판승이 갈등하고 대립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에서 상대에 대한 극한 감정으로부터 '극단성'을 내재하는 의미가 파생됐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설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맞는다고 하기도 조금 어색하다.
오히려 스님의 길은 이판과 사판으로 갈라지기에 이쪽 아니면 저쪽 하나를 양단간(兩端間)에 선택해야 한다는 극단적 생각이 '이판사판'을 어느 쪽이나 막다른 지경이라는 극단적 의미로 몰고 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로 보면 아직 '이판사판'의 의미 변화 과정을 속단하여 말할 처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불교 용어 '이판'과 '사판'의 합성 형태라는 점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민족이 수용한 외래 종교가 여럿이지만 불교만큼 우리의 정신 세계와 실제 생활에 두루두루 영향을 미친 종교도 드물다. 우리 삶의 곳곳에서 불교의 체취가 역력한데 언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말의 얼마간은 불교용어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용어로부터 국어화한 단어들이 많다. ‘아수라장’, ‘아비규환’, ‘야단법석’, ‘이판사판’ 등과 같이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도 불교용어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이들 중에서 ‘이판사판’은 아주 독특한 단어이다. ‘이판사판’ 자체는 불교용어가 아니지만 이 단어를 구성하는 ‘이판’과 ‘사판’은 불교용어이기 때문이다. ‘이판’(理判)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도를 닦는 일을 말하며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스님을 ‘이판승’ 또는 ‘이판중’, ‘공부승’이라고 한다. ‘사판’(事判)은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일’(이것을 ‘山林’ 또는 ‘産林’이라 한다)을 말하며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스님을 ‘사판승’ 또는 ‘사판중’, ‘山林僧’이라고 한다. ‘이판’과 ‘사판’은 아주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다. ‘이판(승)’이 없으면 부처님의 외외(巍巍)한 가르침이 이어질 수 없고,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이 잘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판’과 ‘사판’이 결합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가 ‘이판사판’이다. 이것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판’ 또는 ‘사판’이 지니는 의미와 아주 다른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가 어떻게 ‘이판’과 ‘사판’의 의미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대단히 궁금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은 그렇게 신통하지 못한 편이다.
어떤 사람은, 조선 시대에 스님이 아주 낮은 신분이어서 이판승이든 사판승이든 스님이 되는 것은 인생의 끝이기 때문에 ‘이판사판’에 ‘마지막 궁지’ 또는 ‘끝장’이라는 의미가 붙었다고 하나 쉽게 믿기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 이외에 세 가지 정도를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스님의 길은 이판 아니면 사판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기에 그러한 극단적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극한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추정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닌 듯싶다. 또 하나는, 이판승과 사판승이 갈등·대립한 시절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판’과 ‘사판’을 이용한 극단적 의미 표현이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서로 갈등·대립하다 보면 상대방에 대해 극단적 감정을 갖게 마련인데,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극단성’을 지니는 의미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판’과 ‘사판’의 특성을 고려해서 해석해 보는 것이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용맹 정진하는 ‘이판’의 비장한 행위와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판’의 파렴치한 행위는 모두 ‘이판사판’의 ‘극단성’ 내지 ‘무모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판사판’의 의미 변화 과정을 속단하여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이판’과 ‘사판’의 합성어라는 사실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여러 폐해를 낳고 있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판사판’을 ‘2판4판’으로, 또는 ‘사’를 ‘死’로까지 바꾸어 ‘이판死판’으로 이해한다. 심지어 ‘판’을 ‘한 판’, ‘두 판’의 ‘판’으로 이해하여 ‘이판새〔新〕판’(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판), ‘이판저판’(이런 일 저런 일)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쓰고 있다. 정말 ‘이판사판’식 새말〔新語〕 만들기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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