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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원은 갚는다고 하고 한은 푼다고 한다

by 61녹산 2023.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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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한풀이 춤
이한열 열사 한풀이 춤


 

우리는 "원한이 맺힌다"라는 말을 잘 쓴다. 옛날 군간에도 "원한이여, 피에 맺힌"이라는 가삿말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쓰는 말인데도 원(怨)과 한(恨)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원과 한을 구별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몇 가지 말을 만들어 보면 된다. 원수라는 말은 있어도 한수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원수는 '갚는다'고 하고 한은 '푼다'라고 한다.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도 이 원과 한을 놓고 보면 분명해진다. 일본의 근대 문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 문학의 전통적 특성은 그 유명한 주신 구라처럼 원수갚는 이야기라고 한 적이 있다. 현실 속이든 이야기 속이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일본처럼 복수극이 많은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갚는 문화이다. 원수도 갚고 은혜도 갚는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미안하다고 할 때 '스미마센'이라고 한다. '스미마센'은 아직 갚아야 할 것이 덜 끝났다는 뜻이다. 

 

17세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남용익은 이러한 일본인들의 기질을 보고 "실날같은 은혜도 골수에 새기고 털끝만 한 원망도 갚고야 마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는 푸는 문화이다. 한만 푸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심심한 것까지 풀어 심심풀이라고 한다. 남들이 싸워도 풀어버리라고 하고 죽은 사람들도 한을 남기지 말라고 푸닥거리를 한다. 푸닥거리는 푸는 거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일본 사람은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한다. '기오쓰게데'라는 말이 그렇다.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은 싸움을 하려고 하면 머리띠를 매고 어깨 띠를 죈다. 

 

경제 대국이 되어 여유가 생겼다는 오늘에도 일본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말은 '시메루(죄다)'라는 낱말이다. 고속도로에 붙여놓은 구호판에는 "자동차 문을 꼭 닫고 안전띠를 죄고 마음을 죄라"라고 쓰여 있다. 우리는 원고를 마감한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시메기리'라고 한다. 죄어서 잘라버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무슨 일에 도전할 때 몸을 푼다고 말한다. 싸울 때도 조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웃통을 풀어 젖힌다. 풀지 않으면 힘이 안 나는 사람들이다. 시험 치러 가는 아이를 붙잡고 하는 소리도 정반대다. 일본 사람들은 '간바테(눈을 부릅뜨고 정신 차리라는 뜻)'이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놀랍게도 "야, 마음 푹 놓고 쳐라"라고 말한다. 마음을 놓으라는 말을 한자로 풀이하면 방심인데 말이다. 

 

원은 갚으면 그만이고 끝이지만 한은 풀면 오히려 창조적인 것이 된다. 춘향이의 경우 변사또에 대한 감정은 원이고, 이별한 이도령에 대한 감정은 한이다. 얼마나 다른가. <춘향전>이 만약 원의 문학이었다면 변사또에게 복수하는 드라마로 변하여 일본의 주신 구라 같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변사또를 백 번 죽여도 원심은 없어질지 모르나 그리운 이도령을 만나지 못하는 한은 그냥 남는다. 그러나 <춘향전>은 원이 아니라 한으로 향한 문학이었기에 끝내 님과 다시 만나 이별의 한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정경부인이 되어 백년해로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원수 갚는 이야기는 통쾌하지만 핏방울이 튄다. 그러나 한을 푸는 이야기는 신이 난다. 눈물은 나도 핏방울은 없다. 원수를 갚고 나면 맥이 풀어지지만 한을 풀고 나면 힘이 솟는다. 푸는 데서 나오는 힘, 그것이 바로 요즈음 유행어가 된 '신바람'인 것이다.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 청산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일제 식민지 때의 친일파도 우물쭈물 넘어갔고 이승만 때 부정 선거를 한 사람들도 흐지부지 끝냈다. 그러니 이번만은 과거를 단절하고 깨끗이 청소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보복은 청산보다 더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을 우리는 프랑스 시민 혁명 때의 로베르 피에르에게서 배웠고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때의 스탈린에게서 배웠다. 무수한 숙청이 남긴 것은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었다.

 

배기 숙제라고 하면 털끝만 한 타협도 마다한 수양산 고사리로 이름 높은 선비지만 <논어>에 적힌 대로 그는 추호의 악도 용서하지 않았으나 구악을 논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원은 과거를 향해 있지만 한은 미래를 향해 있다. 우리 민족의 마음에 쌓여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원이 아니라 못다 한 한들이다. 그래서 한을 풀 때 한국인은 강해지고 창조적이 된다. 신바람 나게 일하고 신바람 나게 사는 것, 이것이 새로운 한국의 신형 엔진이요 동력인 것이다. 독재 때문에 하지 못한 한이 있으면 이제는 민주화의 실천으로 그 한을 풀어 자유의 소중함을 맛보게 해야 한다. 과거를 아무리 단죄해도 민주화가 성공하지 않으면 한은 계속 쌓이고 마음 속에 응어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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