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안녕 안녕 내 사랑'. 1978년에 나온 곡이지만 영화에 여러 번 나오면서 대부분이 아는 익숙한 노래다. 그런데 '나성'은 어디일까? 바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이다. 1970년대 한국 상황으로 짐작하건대 등장인물은 이민을 떠나려 하고 있고, '함께 못 가서 정말 미안해요.'라는 주인공은 이별을 선언하는 중이다. 즐거운 날, 외로운 날에 둘이서 지낸 날들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데, 정말로 훗날에 편지가 왔을까?
'나성'처럼 '구라파, 불란서, 서반아, 아라사, 화란, 화성돈' 등이 있었다. 각각 지금의 유럽,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네덜란드, 워싱턴이다. 미리견(미국), 영길리(영국)도 있었는데, 이후에 한자를 덧붙인 미국, 영국, 태국 등이 조합되었다. '법국(프랑스)'이나 '덕국(독일)'은 더 이상 쓰이지 않지만, 하늘길이 열린 현재도 종종 발음이 비슷하다며 '이태리(이탈리아), 월남(베트남)'이라 부르는데, 과연 그 나라 사람들의 생각도 같을까? 오스트레일리아 유학생이 '호주'란 말을 처음 만날 때의 느낌은 우리가 최남선의 시에서 '나팔륜(나폴레옹)'을 볼 때와 비슷할 것이다.
사실 저 이름들은 처음부터 한글로 다 적을 수 있었다. 그런데 1894년 고종이 '모든 공문은 국문으로 본을 삼을 것'을 칙령으로 발표하기 전, 당시에는 공식 문자인 한자로 외국의 나라와 도시 이름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므로 그대로 쓸 수밖에 없는 부분도 많다. 최근에 터키가 유엔에 튀르키예(Türkiye)로 국호 변경을 요청했다. 한때 우리 교과서에 '토이기, 돌궐'이라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유엔은 터키어 발음에 따라 철자를 변경하고 이를 승인했으며, 이미 우리나라 사전에도 반영되었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투르크'계로 부르는데, 유독 영어권과 영어를 따르는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우크라이나의 '키이우'를 러시아식인 '키예프'로 써 온 것과 같다. 정작 우크라이나의 수도인데 말이다.
우리와 서구의 만남은 중국과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자연히 서구 근대 문물 수입 초창기에는 서구의 사물을 가리키는 말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용하던 말을 받아들이는 일이 잦았다. 그중에는 뜻은 무시하고 음이 비슷한 것만을 취하여 한자를 이용하여 번역한, 즉 음역한 말(음차)도 적지 않았다. 이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자를 많이 쓰고 있어서 음역한 말을 받아들이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같은 한자를 그대로 쓰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런데 한자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읽는 법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음으로 읽었다. 그 결과 원래의 소리와는 꽤 차이가 나기도 했다.
‘米突(미돌) : 미터
虎列刺(호열자) : 콜레라
俱樂(구락) : 클럽’
음역한 한자어를 받아들인 예이다. 이것은 ‘미터, 콜레라, 클럽’을 음역한 말인데 우리 음으로 읽어 ‘미돌, 호열자, 구락부’라고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호열자’에서는 ‘랄(剌)’로 적어야 할 것을 ‘자(刺)’로 적게 되어 소리가 더 많이 달라졌다.
음역한 한자어는 비단 서구 문물을 가리키는 말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일본에서 외국의 국명, 인명, 지명도 한자를 이용하여 음역했는데 이것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인명 나파륜(拿破崙), 피택고(皮宅高)
국명 백이의(白耳義), 보로사(普魯斯), 분란(芬蘭), 불란서(佛蘭西), 비율빈(比律賓), 서반아(西班牙),
서전(瑞典), 애급(埃及), 이태리(伊太利), 인니(印尼)
지명 나성(羅城), 막사과(莫斯科), 백림(伯林), 서공(西貢), 서백리아(西伯利亞), 선가파(先嘉陂), 수부(壽府),
위의 예들은 모두 음역한 한자어의 예들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것들이다. 과거에 쓰였던 것들이다. 이것을 지금 쓰는 말들로 바꾸어 보면 아래와 같다.
인명 나폴레옹, 피타고라스
국명 멕시코, 벨기에, 프로이센, 핀란드, 프랑스, 필리핀, 에스파냐, 스웨덴, 이집트,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지명 로스앤젤레스, 모스크바, 베를린, 사이공, 시베리아, 싱가포르, 제네바, 헤이그
지금이야 많이 사라졌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우리말에 들어온 이들 한자어의 생명은 꽤 오래 이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보거나 들을 수 있었다. 1967년에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으로 최근에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을 부르는 말이 ‘동백림 사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백림’은 ‘동베를린’이다.
197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노래 중에 ‘나성에 가면’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나성’은 무슨 성의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로스앤젤레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1870년에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을 지금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라고 하지만 예전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보불전쟁’이라고 했었다. ‘보로사(普魯斯)’와 ‘불란서(佛蘭西)’가 벌인 전쟁이라고 하여 그렇게 줄여 말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말로 읽어 한글로 표기하는 관습이 정착되어 한자 음역어가 사용되는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인명의 경우에는 지금은 거의 쓰이는 사례를 보기 어렵다. ‘섭씨, 화씨’ 정도에서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섭씨’는 고안자인 스웨덴의 셀시우스(Celsius)의 음역어인 ‘섭이사(攝爾思)’에서 첫 글자를 따고 거기에 ‘씨(氏)’를 붙여 만든 말이다. 마찬가지로 ‘화씨’는 고안자인 독일의 파렌하이트의 음역어 ‘화륜해(華倫海)’에서 유래한다.
국명은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영국, 미국’의 경우에는 첫 글자만 음역한 글자에서 따고 뒤에 ‘국’을 붙인 말을 사용한다. ‘덕국, 법국’처럼 비슷한 사례들이 더 있었는데 ‘독일, 프랑스’에 밀려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이태리, 이탈리아’, ‘불란서, 프랑스’, ‘서반아, 스페인(에스파냐)’은 여전히 경쟁을 하고 있다. 다만, 한자어 음역어가 우리말 음역어에 많이 밀린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일부 관습적으로 한자어 음역어가 계속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때를 미는 데 사용하는 ‘이태리타월’은 ‘이태리타월’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어와 프랑스어의 대역사전은 ‘한불사전, 불한사전’이라고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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