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 상태를 실감하게 하는 요즘이다. 장마가 지랄맞게도 진행되고 있고 비 피해는 계속해서 싸여 가고 있는데다 인적 피해가 50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이젠 땡볕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다. 정부는 있으나마나한 어거지 대책만 내놓고 있고 지방자치 단체는 서로 책임을 떠 넘기느라 눈이 씨뻘게져 서로 호통만 치고 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2023년의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도대체가 누가 2번을 찍었나 울화통만 치밀고 속에서 그냥 열불만 치받쳐 올라오고 있는 2023년의 여름이다.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로 장맛비가 멈춘 대신 뜨거운 퇴약볕에 찜통더위에 죽어나는 건 서민들 뿐이니 기온과 함께 혈압지수가 높아만 간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갑자기 '장마'라는 단어가 순수 우리말인지 아니면 한자인지 궁금하여 인터넷을 찾아보니 순 우리말이란 주장도 있고 한자라는 주장도 있다. 장마는 주로 여름철에 여러 날 비가 내리는 날씨가 지속되는 기상 현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듯 '장마'라는 단어에서 '장'자가 한자 '긴장(長)'을 연상하여 한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마'자에 해당하는 적합한 한자가 있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 '마'자는 '물이름 마(溤)'자를 사용하여 ‘장마(長溤)’라고 표현한 걸 봤는데 이건 논리가 부족하다.
중국어 사전에 ‘長溤(장마)’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니 이런 단어는 중국에서도 사용하지 않고 한자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장마’를 ‘매화가 익는 초여름에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梅雨(매우)’라고 한다.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라는 학자가 어린이 학습용으로 한자 3,360자에 한글로 뜻과 음을 달아 만든 '훈몽자회'라는 책자를 찾아보니 장마를 ‘장마임(霖)’ 자와 ‘비우(雨)’’ 자를 합성하여 ‘임우(霖雨)’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우리말로는 ‘오란비’라고 적고 있다. ‘오란비’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장마의 옛말'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오란’이란 ‘오래’의 옛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오란비는 ‘오래 내리는 비’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럼 ‘장마’라는 단어의 어원은 어떻게 된 것인가? 자료를 찾아보니 '장마'는 본디 중세 한국어에서 '댜ᇰ마(댱의 'ㅇ'은 옛이응)'라고 썼으며, 이는 한자어인 長(길 장) 자와 '비(물)'를 뜻하는 고유어 '마'가 합쳐진 합성어라고 한다. 즉 장마라는 단어에서 비록 ‘장(長)’ 자가 한자의 어원으로 있으나 이미 우리말로 고유어화되었기 때문에 '장마'의 한자어 표기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장마는 우리말 방언사전에 보면 지역에 따라 ‘당마’라고 부르기도 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장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암튼, 장마는 16세기 문헌에 '댱마ㅎ'로 보이며, 이는 '댱'과 '마ㅎ'로 분석된다. '마ㅎ'는 댱마ㅎ보다 역사가 깊은 단어로, 중세국어에서 비[雨]와 장마라는 두 가지 의미를 띠었다. 댱마ㅎ의 '마ㅎ'는 '비'를 뜻하는 것이다. '마ㅎ'가 장마를 뜻할 때는 '오랫동안 내리는 비'와 함께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현상'이라는 의미도 띠었다. 장마를 뜻하는 마가 현재 제주, 함남 방언에 남아 있다.
'마ㅎ' 앞에 붙은 '댱'은 한자 장(長)이다. 비가 오래 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비를 뜻하는 '마ㅎ'에 '댱'을 첨가하며 '댱마ㅎ''라 한 것이다. 그리하여 댱마ㅎ는 오랫동아 내리는 비로 풀이된다. 또한 댱마ㅎ는 '마ㅎ'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현상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졌다. 중세국어 '댱마ㅎ'는 복잡한 음운 변화를 거쳐 현재의 '장마'로 이어졌다. '장마'의 어원을 '비가 떨어지는 소리, 큰 방울로 떨어지는 비'를 뜻하는 고대 산스크리트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하나 약간 허황된 느낌이 든다고 하겠다. 중세국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이런 어처구니없는 설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가 싶다.
현대국어 '장마'에도 '오랫동안 내리는 비'와 함께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현상'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달려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주로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현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전자의 의미는 '장맛비'가 대신한 지 이미 오래다. '장마'의 어원을 고려하면 긴 장마와 같은 표현에서 '긴'은 군더더기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장맛비는 17세기 문헌에 '댱맛비'로 처음 등장한다. '댱마ㅎ'가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현상이라는 의미로 편향 또는 축소되어 쓰이면서 오랫동안 내리는 비라는 의미에 공백이 생기자 이를 메우기 위해 댱마와 비를 결합하여 댱맛비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든 것이다. 댱맛비는 쟝맛비를 거쳐 장맛비가 된다. 장맛비는 [장마삐] 또는 [장맏비]로 발음해야 한다. 가끔 [장마비]로 발음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이시옷의 개념을 알고 있다면 올바른 발음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아쉽다.
장맛비가 등장한 이후 장마는 오랫동안 내리는 비라는 의미를 장맛비에 넘겨주고,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현상이라는 의미에 충실하고 있다. 장마와 장맛비의 의미 분담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다. 장마에는 가을장마, 개똥장마(오뉴월 장마), 겨울장마, 고치장마, 늦장마, 마른장마, 봄장마, 억수장마, 여름장마 등 그 종류도 제법 된다. 벼농사가 주업이었던 우리에게 있어서 비는 매우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비와 관련된 용어가 자연스레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홍수는 잠깐 괴롭히는 것이기에 참고 견딜만 하다. 목숨만 지키면 된다. 하지만 가뭄은 장기간 지속되기 때문에 더욱 우리네를 힘들게 한다. 가뭄이 든 때에는 농촌으로 피서가는 것을 삼가야 한다. 농민들의 마음이 타들어가고 있기에 곧잘 큰 싸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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