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흙’을 가려 쓰지 못하고 헷갈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뜻을 가려서 이야기해 보라면 망설일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뜻은 잘 가려 쓸 수 있으면서 그것을 제대로 풀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아는 사람들이 이런 우리말을 버리고 남의 말을 뽐내며 즐겨 쓰느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다는 사람들이 가르치지 않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우겠는가? 공부하고 글 읽어 안다는 사람들은 우리말 ‘땅’과 ‘흙’을 버리고 남의 말 ‘토지’니 ‘영토’니 ‘토양’이니, ‘대지’니 하는 것들을 빌어다 쓰면서 새로운 세상이라도 찾은 듯이 우쭐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똑똑하고 환하게 알고 있던 세상을 내버리고, 알 듯 모를 듯 어름어름한 세상으로 끌려 들어간 것일 뿐이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땅’은 우리가 뿌리내려 살아가는 터전을 뜻한다. 우리는 땅을 닦고 터를 다듬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땅을 헤집고 논밭을 일구어 먹거리를 얻어서 살아간다. 삶의 터전인 땅에서 온갖 목숨이 태어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다. 세상 온갖 목숨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가 바로 이 ‘땅’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땅을 ‘하늘’의 짝으로 알고 믿으며 살아왔다. 땅과 하늘이 짝을 이루어 모든 목숨을 살리고 다스리는 것으로 믿고 살았다. 이것은 일본서 끌어들인 ‘육지’니 ‘토지’니 ‘영토’니 ‘토양’이니 하는 말들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세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땅’을 “강이나 바다와 같이 물이 있는 곳을 제외한 지구의 겉면”이라고 풀이한 것은 좁은 뜻일 뿐이다.
그리고 땅은 ‘땅덩이’라는 낱말을 거느리고 있다. ‘땅덩이’는 지금 ‘지구’라는 한자말에 짓밟혀 쪽도 못 쓰지만, ‘스스로 빙글빙글 돌면서 여러 벗들과 더불어 해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달리고 있는 작은 별’을 뜻한다. 땅은 우리네 삶의 터전이지만, 땅덩이는 누리 안에 떠서 도는 먼지같이 작은 별이라는 말이다.
‘흙’은 땅을 이루는 여러 가지 가운데서 알짜배기다. ‘흙’은 물과 모래와 자갈과 돌과 바위와 더불어 땅을 이루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땅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온갖 목숨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거의 흙에 힘입어 살아가기 때문에 흙을 땅의 알짜배기라 하는 것이다.
땅에서도 물을 머금은 흙이야말로 온갖 푸나무(풀과 나무)와 갖가지 벌레와 짐승과 사람의 목숨을 낳아서 기르는 진짜 어머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흙은 애초부터 흙으로 있던 것이 아니라, 햇빛과 물과 바람이 바위와 돌과 자갈과 모래를 더욱 잘게 부수고 게다가 푸나무와 벌레와 짐승과 사람이 삶의 온갖 찌꺼기를 보태서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땅’이나 ‘흙’과 비슷한 낱말에 ‘뭍’도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뭍’을 “지구 표면에서 바다를 뺀 나머지 부분”과 “섬이 아닌 본토”라는 두 가지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두 가지 풀이를 하나로 아울러야 ‘뭍’의 뜻으로 올바르다.
땅덩이를 덮고 있는 표면(땅낯바닥, 땅갗)에서 바다를 빼면 나머지는 ‘뭍’이 아니라 ‘뭍과 섬’이다. 그러므로 ‘뭍’은 거기서 다시 ‘섬’을 뺀 나머지라 해야 올바르다. 그러니까 바다가 아닌 땅갗에서도 ‘섬’이 아닌 곳만을 ‘뭍’이라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섬’은 바다에 빙 둘러싸인 곳이므로, ‘뭍’이란 바다에 빙 둘러싸이지 않은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뭍’은 바다와 맞서 짝이 되는 낱말이 아니라 ‘섬’과 맞서 짝이 되는 낱말이다.
몹시 분하고 원통한 일이 생기면 땅을 칠 노릇이라고 하고, 한숨을 쉽게 되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다. 먹고 살 길은 오로지 땅을 파는 일밖에 없다고 해서 땅을 파먹던 농투성이들은 그저 땅을 치면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면서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땅이란 한의 대상이 되었다.
땅이란 지구의 표면 가운데에서 물로 찬 부분을 뺀 곳을 이르는 말이다. 땅이 기름지면 그 문화도 기름지게 되고, 땅이 거칠면 그 문화도 자연히 거칠어진다. 넓고 넓은 땅 중에서 내가 부칠 당 한 뙈기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부쳐 먹을 땅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하여 왔는가?
오늘 물질 만능의 시대에 비록 사람의 값이 땅에 떨어졌다해도이 세상의 주인은 여전히 사람이다. 땅이 있는 한 사람들은 땅에 의지해서 살아가면서 차츰 서로 아끼고 도우면서 상대의 가치를 알아주게 될 것이다.
"땅 넓은 줄 모르고 하늘 높은 줄만 아는 사람"
은 키만 멀대처럼 커질 수 있다. 그에게는 윗사람만 중요하고 동료나 이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사람에게 땅 넓은 줄 알게 해 줌으로써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어 주자.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땅 짚고헤엄치기다."
땅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가 깨어져 돌이 되고, 돌이 깨어져 모래가 되고, 모래가 깨어져 흙이 된다. 흙은 부드러워서 손으로 한 줌 쥘 수 있고, 물을 부으면 손으로 이길 수 있으며, 아무리 굳은 곳이라도 삽과 호미로 팔 수 있다. 흙을 파서 만든 구덩이에 봉숭아 꽃씨를 심고 복을 돋운 뒤에 발로 밟아 놓으면 머지않아 봉숭아 줄기에서 빨간 꽃이 탐스럽게 핀다. 그 꽃을 따다 손톱과 발톱에 물을 들이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즐거움을 주는 것이 바로 땅이요 흙이다.
"흙에서 나서 흙을 만지며 늙은 이 농부에게는 논과 밭 가는 사람의 팔자는 그대로 신선이었다. 이런 농부에게 있어서는 흙, 땅은 그대로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이무영이 이렇게 고백했던가?
토지(土地)는 땅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땅에 비해 쓸모가 적다. 겨우 토지 대장을 만드는 데 쓰이고, 토지 측량에 쓰인다. 몹시 사무적이고 계량적인 곳에만 쓰일 뿐, 인간의 삶과 연결된 다양한 정서를 대변하지 못한다. 그래서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그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에는 소설 이름으로서 땅만 못하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흙"
이 덮여 있는 땅, 그 땅이 우리의 삶의 터진인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땅은 농지(農地), 건물을 지을 땅은 대지(垈地), 공장을 지을 땅은 부지(敷地),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땅이 토지(土地)이다. 그리고 토지는 흙으로 이루어진 땅으로 승화해야 계산을 넘어선 경지, 인간의 정서가 담긴 경지로 들어설 수 있게 된다.
흙은 땅거죽의 바위가 분해되어 이루어진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이 섞여서 이루어진 물질을 가리키는 과학용어이기도 하다. 역사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경 사회에서 흙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건축의 재료이자 토기 등 필요한 물품의 재료였고 사람이 살다가 되돌아갈 거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승화되거나 고향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인간 식생활 재료의 주된 원천인 땅은 산업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산성비, 화학 비료, 살충제 등으로 오염되어 신음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농촌의 자연, 토속적인 성격, 농민의 생활실태 등을 잘 나타낸 흙의 문학으로는
이광수(李光洙)의 <흙>(1932),
이무영(李無影)의 <흙의 노예>(1940), <흙을 그리는 마음>(1935), <제1과 제1장>(1939)
박경리(朴景利)의 <토지> 등이 있다.
이광수의 <흙>은 귀농사상(歸農思想)을 주제로 하여 쓴 계몽소설로서, 흙을 소재로 하여 민족의 혼을 간직하지만 가난하고 무식한 농민을 위하여 시혜적인 계몽자·설교자의 자세를 취한 작품이다. <흙>의 주인공 허숭은 자신의 뿌리를 농촌에서 확인하며, 조상의 피땀이 섞인 흙을 떠나서는 자신의 가치관을 찾을 수 없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 밖에 성격과 환경이 다른 여러 명의 주변인물들이 결국은 흙을 찾아 농촌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시골을 전혀 모르는 정선은 간통사건으로 철도에 투신하여 다리를 잘리고 살여울에 와서 남편을 돕게 되며, 기생인 선희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살여울에 와서 유치원을 짓고 농촌아이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갑진은 허숭의 인품에 감화되어 검불랑에 들어가 개간사업에 헌신하며, 허숭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가정을 버리고 단순한 농민 속에서 이상과 참된 인간성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 나무들을 다 찍어내고 나무뿌리를 캐내고 살여울 물을 대느라고 보를 만들고, 그리고 그야말로 피와 땀을 섞어서 갈아놓은 것이다. 그 논에서 나는 쌀을 먹고 숭의 조상과 순의 조상이 대대로 살고 즐기던 곳이다. 순과 숭의 뼈나 살이나 피나 다 이 흙에서, 조상의 피땀 섞인 이 흙에서 움돋고 자라고 피어난 꽃이 아니냐.”
라는 본문에서도 소설의 성격과 분위기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이무영은 남달리 농토에 애착을 가지고 농촌을 사랑하였던 작가로, 흙을 문학으로 삼고 흙으로 회귀한 농민문학의 선구자이며 농촌에 파묻혀 살면서 이 땅의 농민문학의 광맥을 찾은 성실한 광부였다. 그는 흙을 사랑하고 영락한 농민을 지극히 사랑한 반면 악질적인 지주나 중농을 증오하였다. 아울러 그의 작품도 농촌 삶의 어려움을 표현함으로써 농촌세계의 재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흙의 노예>에서는 농촌의 대중인 소작농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심각한 이야기를 전하여주고 있다. 소작농들이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지주의 가혹한 이중착취 속에서 혹사당하는 것을 보고 작가로서 그것을 그대로 넘겨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찾어, 땅.”
하는 외마디를 남긴 채 숨을 거두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농민>에서는 토호들의 가련한 희생물로서 갖은 수탈과 학대를 당해 온 비천한 농민들이, 동학군의 힘을 빌려 골수에 맺힌 양반 토호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하는 반항정신마저 풍기고 있다.
<제1과 제1장>의 주인공 김수택은 좀처럼 얻기 어려운 신문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낙향을 한다. 기자생활이 작가생활을 망쳐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반겨 맞는 아버지와 함께 수택의 농촌생활은 시작되며, 아버지 김영감은 아들에게 모든 농사일을 정성껏 가르친다. 그 해 수확은 소작료·비료대·지세까지 떼고 나니 벼 여남은 섬뿐이었다. 사람들이 말리는 것도 가리지 않고 수택은 볏가마니를 지고 휘청거리는 다리로 눈물과 코피를 쏟으면서도 “내일은 우리 논 닷마지기의 타작이다.”라고 즐거워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제1과 제1장>에서는 흙냄새에 대한 그리움이 도시적 삶에 대한 반작용인 동시에 삶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관점으로 표현되었다. 본문내용 중 한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흙내였다. 그것이 흙내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 일찍이 그가 어렸을 때 듣던 아버지의 음성이 바로 귓전에서 울리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흙내를 맡아야 산다. 너도 공부를 하고 나선 나와 농사나 짓자.’……그러나 조소하던 그 말이 지금 그의 마음을 꾹하니 사로잡는 것이었다. ‘집으로 가자, 흙을 만지자.’, ‘흙냄새를 싫어하는 것이 사람이냐?’”
박경리는 땅이나 대지가 아닌 <토지>로 제목을 정하고 이를 다시 ‘농토로서의 토지’, ‘고향으로서의 토지’라는 두 관점에서 글을 전개하였다.<토지>는 이 땅과 땅 위에 살고 있는 숱한 형태의 삶과 그 삶들의 관계·가치관·인생관을 함축하고 있다. 박경리는 이처럼 다양한 인간들과 그들의 정서 및 사유를 통하여 전통사회의 붕괴와 가치관의 몰락, 인간관계의 파탄을 묘사하면서 각양의 인간상들이 이같은 사회적 변모 속에서 어떻게 고민하고 패배하며, 혹은 어떻게 극복하고 생존하여왔는가를 거시적 관점으로, 그러나 미시적 치밀성을 가지고 포착하고 있다.
박경리(朴景利)가 지은 장편소설 토지는 1969년부터 집필에 들어가 1994년에 전 5부 16권으로 완간한 대하소설이다. 한말의 몰락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이르는 과정을 지주계층이었던 최씨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폭넓게 그려내고 있다. 지난 시대 한민족(韓民族)이 겪은 고난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해 낸 점에서 <토지>는 역사소설의 규준에도 적응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탐구로서 더 큰 성과를 얻고 있다.
제1부의 시간적 배경은 1897년 한가위에서부터 1908년 5월까지인데, 평사리라는 전형적 농촌마을을 무대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평사리의 전통적 지주인 최참판댁과 그 마을 소작인들을 중심인물로 하여 최참판댁의 비밀(최치수의 살해사건 등)과 조준구의 계략, 귀녀·김평산 등의 애욕관계 등이 한데 얽혀 한말의 사회적 전환기의 양상이 그려져 있다. 특히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 봉건 가부장체제와 신분질서의 붕괴, 농업경제로부터 화폐경제로의 변환 등 한말 사회의 변화가 소설의 배경이 되면서, 최참판댁의 몰락과 조준구의 재산 탈취 과정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제2부의 시간적 배경은 1911년 5월 간도 용정촌의 대화재로 시작되어 1917년 여름까지인데, 여기서는 경술국치 이후 1910년대의 간도 한인사회의 삶의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조준구의 계략에 재산을 빼앗긴 서희의 간도 이민의 형태를 빌리면서 서사적 공간이 이동되기 때문이다. 간혹 지리산 동학 잔당의 모임을 제외하고는, 국내정세보다 간도를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정세가 주요한 배경을 이루면서, 최씨 일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립운동의 양상을 폭넓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서희의 복수, 곧 최씨 일가의 귀환을 향해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다.
제3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1929년 원산총파업과 광주학생사건까지 1920년대의 진주와 서울 같은 도시에서의 삶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서희의 노력에 의한 최씨 일가의 대상(大商)으로의 성장이 발판이 되어 일제에 의하여 추진된 식민자본주의화 과정을 도시를 중심으로 그려놓고 있는 데 연유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운전수·의사 등 직업인과 교사·신여성·문필가 같은 지식층이 대거 등장한다. 그리고 복수 후 허무에 부딪친 서희의 삶과 동학 잔당의 세력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려던 김환은 일제의 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송관수로 전형화되는 민중적 삶과 서울의 임명희를 둘러싼 지식인과 신여성들의 삶으로 이동한다.
제4부는 1930년부터 1937년 중일전쟁과 1938년 남경학살에 이르는 시기가 배경이다. 서사의 공간은 서울·동경·만주에서 하동·진주·지리산까지 더욱 확대되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더욱 다원화된다. 그러면서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독립운동의 여러 노선이 제시되는가 하면, 지식인들의 사상적 경향과 등장인물을 통해 일제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시도된다. 길상의 출옥과 군자금 강탈사건, 윤인실과 오가다의 사랑이 중요한 서사적 의미를 지닌다.
제5부의 시간적 배경은 1940년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인데, <토지>의 대단원을 맺는 부분이다. 송관수의 죽음, 길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단체의 해체, 길상의 관음탱화 완성, 오가다와 유인실의 해후, 태평양전쟁의 발발, 예비 검속에 의한 길상의 구속 등이 이어지면서 <토지>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특히 5부에서는 광복의 날을 기다리는 민족의 삶들이 펼쳐지는데, 양현과 영광, 윤국의 어긋난 사랑이 중요한 갈등을 이룬다.
이처럼 <토지>는 최씨 일가의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이 이루어놓은 사회적 공간에 따라 당대 사회의 변모가 충실히 그려져 있다. 또한 서희와 조준구의 원한관계, 월선과 용이의 한(恨) 많고 영원한 사랑, 김환의 죽음 등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양상 또한 폭넓게 형상화되어 작품의 대강을 형성하고 있다.
<토지>에 대한 작품 분석은 26년이란 오랜 집필 기간 속에서 부분적으로 실시되었는바, 전 5부가 완간되어 총체적인 분석이 가능해졌다. 작자 자신도 언급했듯이 <토지>는 여느 역사소설과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이것은 작자의 전반적인 소설세계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박경리 소설은 인간삶의 역사적 배경과 현실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이 문제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면에 대해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박경리는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소설화했다. 특히 작자는 <토지>에서 간난(艱難)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恨)과 강인한 생명력에 대해 서사적 관심을 갖는다. 한이 깊은 자신의 삶을 사랑의 차원으로까지 아름답게 승화시킨 송관수나 주갑이·조병수 등은 박경리가 창조한 대표적 인물이고, 이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 탐구 내용의 핵심이다.
작자에 따르면 한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정서가 아니라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근원적 모순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한은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슬픔이기도 하지만, 모순을 극복하려는 동기와 염원, 희구를 낳는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성격을 지닌다. 영원한 것은 추구하기 위해, 혹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풀어야 할 과제가 된다. 그러므로 이 한을 어떻게 승화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작자에게 본질적 물음인 셈이다.
여기서 작자는 한을 지니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제시하고 그들이 한을 간직한 채 어떻게 살아가며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천착한다. <토지>의 인물 대부분이 이 한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한의 사상’은 작품의 핵심 중 하나이다. 곧, 작자는 한의 문제를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형상화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간탐구를 통해 <토지>는 인간의 보편적 본질에 대한 이해를 깊게 도모하는가 하면, 새로운 시대에 인류가 성취할 삶의 방식에 대한 전망을 보여 준다.
한편, 작자는 ‘한의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생명사상’을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작자는 생명을 억압하는 모든 물질적 힘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들이 균형과 긴장을 이루는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양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랑을 주제화한다. 작자는 이 생명사상을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을 통해서 형상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지>에 나타나는 사상은 ‘생명사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작자는 이 ‘생명사상’을 통해 한민족(韓民族)의 세계관이 지닌 인류보편적 가치를 선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을 삭이고 사랑으로 승화시켜 창조적으로 변용하는 인간을 그리는 것은 실제로 한민족에게 있었던 인간의 모습이며, 있어야 할 인간의 모습을 작자는 창조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들이 자신을 창조성의 존재로 고양시키는 세계에의 기대이며 참다운 생명에의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생명사상에 대한 형상화는 작품에서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는 일을 초반부터 예시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 길상으로 하여금 실제 작업을 완수하도록 하는 데서 여실히 알 수 있다. 이로써 작자가 <토지>를 지은 것은 길상이 관음보살상을 그리는 것과 동일한 작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작품에 그려진 인물들의 모습은 바로 그 큰 자애의 마음에서 창조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김두수나 조준구 같은 부정적 인물들, 정석이나 송관수 같은 험난한 인생 역정을 살아가는 인물들, 몽치나 모화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그리는 데 있어 작자는 자애의 마음으로써 형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이나 복종보다도 개개 생명에 대한 큰 자애심을 강조하는 동양적 세계관이 이 작품의 심층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토지>가 한국소설사에서 갖는 소설사적 위상은 크다. 하지만 <토지>는 여러 논자들에 의해 한계가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근대전환기의 역사 현실, 즉 봉건사회의 해체와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토지와의 관련 속에서는 살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회를 개혁하려는 제반 운동과 지향의 기본동력을 산출해 낸 봉건적 토지 소유관계의 모순과 그 모순의 발현양상에 대해서는 작자가 심도 있는 형상화를 하고 있지 못하다.
이처럼 토지와의 관련을 고려하지 않을 때, 신분질서의 해체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할 뿐이지 역사 전개의 본질을 담아내는 데까지 미치지 못한 문제점을 낳는다. 자칫하면 근대전환기라는 서사적 배경이 소재주의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토지>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한의 사상’과 ‘생명사상’을 근간으로 한 인간의 본원적 진실을 탐구하고, 언어예술로서의 사투리와 속담·격언 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한국어가 지닌 미적 특질을 최대한으로 살림으로써 한국소설사에서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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