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승강장에 전동차가 들어오는 때에 아래와 같은 안내 방송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어 발이 빠질 염려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사용한 우리 역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퍽 신선하고 뭉클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우리의 본래 의미를 생각한다면 안내원과 손님 사이에 우리로 묶일 만한 특별한 조건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라고 하니 역이 마치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과거 열차를 타고 여행하려고 하면 기관사가 열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안내 방송을 했는데, 그 내용은 언제나
"당 열차는 00시 00분에 서울역을 출발하여 00시 00분에 부산역에 도착하는 새마을호 열차입니다."
라는 식이었다. 1999년에 철도청 국어 순화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 표현을
"이 열차는 ....."
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였는데 철도청의 한 직원이
"우리 열차는 ......"
으로 고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생각해 보니 이 열차보다 우리 열차가 논리적으로는 덜 정확하지만 손님에게는 친근감을 줄 것 같아서 둘을 다 쓰되 상황에 맞게 골라 쓰는 것으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로는 당(當)이라는 한자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와 우리라는 우리말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전동차를 타려고 기다리다가 이 말을 들으면 제법 기특함이 느껴지고 우리말을 따스한 정감에 다시 한번 편안함을 느낀다.
국어에서 나의 쪽을 가리키는 말로 오랫동안 쓰이던 것이 당(當)과 본(本)이었다.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시기에 일본어투를 배워서 쓰던 관례에 따라서 이 두 말은 정치인, 공무원, 법관, 경찰, 군인 등 주로 권위주의에 물든 축에서 즐겨 썼다. '나는' 또는 '저는'을 '본인은'으로 자랑스럽게 말하는 정치인과 군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적어도 자신을 본인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국어를 잘 쓰는 사람이 결단코 아니다. 본인은 대명사 나의 의미로 쓰지 말고 명사로서 당사자, 또는 그 사람 자신의 의미로 써야 한다.
혼인에는 본인(당사자)의 동의 의사가 필요하다.
판단을 하기 전에 본인(그 사람 자신)의 진술을 들어야 한다.
지금도 은행에서는 당행(當行)이라고 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회사에서는 당사(當社)라고 쓴다. 당행이나 당사는 권위주의적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소홀한 어법이다. 무엇에 해당하는 은행, 무엇에 해당하는 회사를 가리킬 때에 당행, 당사라고 하는 법인데, 다짜고짜로 당행, 당사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어에서는 받아들이기 얿다. 이제는 우리 은행, 우리 회사로 고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경우에 따라서는 당 대신에 '그, 이' 같은 관형사를 쓰는 것도 좋다.
나를 저로 낮추어 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저는 구어체에서만 쓰인다. 상대를 향하여 말할 때에 상대가 자기보다 윗사람이면 저를 쓴다. 상대가 집단이면 그 구성원 중에 손 아랫사람이 있다고 해도 저를 사용한다. 집단 구성원이 모두 손 아랫사람이면 나라고 해도 괜찮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말할 때에는 저를 쓴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에서 말할 때에도 저를 쓴다. 방송 출연자는 방송에서 시청자를 향하여 말할 때 저를 써야 한다. 저를 쓸 때에는 반드시 높임법 가운데 아주 높임법(하십시오체, 해요체)을 사용해야 한다.
나를 쓸 때에는 상대에 따라서 높임의 단계(하십시오체, 하오체, 하게체, 해라체, 해체)를 골라서 쓸 수 있다. 그리고 다 아는 것이지만 나와 저를 주어와 부사어, 관형어로 쓸 때에는 내가, 제가, 내게, 제게, 내, 제 처럼 바꿔 쓴다는 점도 주의할 점이다.
나와 저의 복수형은 우리와 저희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겸양어가 저희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 회사를 저희 회사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을 낮추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겸양어로 저희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겸양어로 저희를 쓸 수 없다는 저이다. 그 회사 사장에게 그 회사 직원들이 저희 화사는 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같은 시민끼리 저희 서울은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잘못이다. 특히 나라처럼 주권을 가진 주체에 대해서는 저희 나라 같은 겸양어를 붙일 수 없다. 반드시 우리나라라고 해야 한다. 아무리 큰 나라 대통령에게 말하더라도 언제나 우리나라라고 해야지 저희 나라라고 하면 안 된다.
우리와 관련하여 곤란한 표현이 있다. 우리 집, 우리 어머니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은 좀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친구에게
"우리 마누라에게 전화 좀 해 다오."
라고하면 친구가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울 수가 있다. 따라서 개인주의가 점점 자리 잡아가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이런 표현은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 언어문화에서는 아직 이 표현이 틀렸다고 나무랄 수는 없다. 우리는 나의 한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 우리 서방님을 사용하는 세대가 사라지고, 내 남편, 내 마누라, 내 아내를 익숙하게 사용하는 세대가 대세를 이루게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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