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흐지부지'란 말이 제법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일이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시작되었는데, 그 결과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그 일이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1999)에는 '확실하게 끝맺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넘기는 모양'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1992)에는 이 뜻 이외에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걸고들거나 말썽을 부리는 모양'이란 풀이도 있는데, 용례가 없어서 그 쓰임을 알 수 없다. '흐지부지'는 부사로도 쓰이지만, '흐지부지하다'나 '흐지부지되다'란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그럼. 결말을 내야지. 흐지부지하고 가실 듯 싶소?" <흙(1932년)>,
"꼭 사 원 남엇네] 하고 선뜻 알리고 [빗갑고 뭣하고 흐지부지 녹앗서-] 어색하게도 혼잣말로 우물쭈물 우서버린다." <만무방(1934년)>,
"조기회조차 지도자를 잃고, 흐지부지 해산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상록수(1935년)>,
"대문깐에 나간 안해도 좀처럼 들어오지 않었다. 그러는 동안에 흐지부지 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날개(1949년)>
이 '흐지부지'는 단어의 구조로 보아 '흐지'와 '부지'로 분석될 것으로, 그리고 한자어일 것으로 예상된다. '애지중지(愛之重之), 감지덕지(感之德之), 전지도지(顚之倒之), 좌지우지(左之右之)' 등의 한자어들이 있어서 그러한 추정을 하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옛날 문헌에서 그 용례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단어가 가장 먼저 발견되는 문헌은 사전이다. 조선어학회에서 간행한 『큰사전』(1957년)에 올림말 '흐지부지'에 '끝을 마무르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넘기어 버리는 꼴'이란 풀이가 있는데, 그 풀이 뒤에 괄호를 열고 '시지부지'와 '히지부지'를 첨가해 보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흐지부지'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어형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시지부지'와 '히지부지' 올림말을 다시 찾아보면 모두 '흐지부지'로 풀이되어 있어서 명쾌하게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그 이후에는 '흐지부지'가 올림말에서 빠진 사전은 없다. 그렇다면 '흐지부지'의 이전 형태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총독부에서 1920년에 간행한 『조선어사전』에는 '흐지부지'란 어형은 올림말에 올라 있지 않고, 대신 '휘지비지(諱之秘之)'란 한자어가 실려 있다. 그 뜻은 '기탄(忌憚)하여 비밀히 하는 것' 즉 '꺼려서 비밀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줄여서 '휘비(諱秘)'라고 한다는 설명도 있다. 이어서 문세영의 『조선말사전』(1938년)에도 이 '휘지비지(諱之秘之)'가 실려 있고,
① 결과가 분명히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
② 꺼려서 비밀히 하는 것'이란 풀이가 있는데,
'흐지부지'는 여전히 등재되어 있지 않다. 조선어학회의 큰사전에도 이 '휘지비지(諱之秘之)'는 올림말로 실려 있는데, '남을 꺼려서 몰래 얼버무려 넘김'이란 풀이가 있다. 그리고 준말이 '휘비(諱秘)'라고 되어 있고, '휘비(諱秘)'는 '휘지비지'의 준말로 풀이되어 있다.
결국 '흐지부지'는 '휘지비지'란 한자어가 그 어원인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총독부의 사전에서 처음 이러한 기술을 한 후에 다른 사전에서 이것을 참고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신중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에 보이는 '히지부지'와 '시지부지'는 이 설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휘지비지'가 단모음화하여 '휘지'가 '히지'로, 그리고 '비'가 '부'로 변화하여 '비지'가 '부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히지부지'는 20세기 초기의 문헌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가 히지부지 끝이 날 무렵에야, 동혁은 서기석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상록수(1935년)>,
"동화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바람에, 윳노리판은 히지부지 흩어지고" <상록수(1935년)>
또 이 '히지부지'가 구개음화하여 '시지부지'로도 쓰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그 예가 문헌상에서 발견되지 않아 안타깝다.
'휘지비지(諱之秘之)'는 '히지부지'나 '흐지부지'로도 변화할 수 있는데, 이처럼 'X지X지'와 같은 구조를 가진 한자어는 19세기에 무척 많이 나타난다. 19세기의 문헌 자료에서 검색되는 그러한 구조의 단어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들 중에는 상당수가 현대 국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감지거지, 감지덕지, 년지측지, 년지휼지, 당지뉵지, 뎐지뇨지, 면지고지, 민지긍지, 민지휼지, 살지능지, 애지중지, 양지휵지, 억지양지(抑之揚之), 역지사지(易之思之), 위지협지, 애지즁지(愛之重之), 전지도지(顚之倒之), 좌지우지(左之右之), 쳔지도지, 치지망지, 형지장지(刑之杖之), 휵지교지, 희지은지, 힐지항지.
이러한 예들로 보아서 '휘지비지(諱之秘之)'도 19세기에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단어로 추정된다. 그것이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와서 '흐지부지'로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적폐수사를 연내에 마무리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는 검찰총장의 발언이 적폐를 덮어둔 채 흐지부지하거나 어영부영 끝내려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수사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오해는 불식되었지만 한때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일의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지 않고 대충 넘어가거나 크게 시작한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끝낼 때 ‘흐지부지’했다는 표현을 한다. 순우리말 같지만 사실은 ‘휘지비지(諱之秘之)’가 변한 말이다. ‘휘(諱)’는 ‘꺼릴 휘’, ‘비(秘)’는 ‘숨길 휘’라고 훈독하며 ‘之’는 흔히 ‘갈(go) 지’라고 훈독하는 글자이지만 여기서는 앞의 글자인 ‘諱’나 ‘秘’가 동사 역할을 하도록 돕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휘지비지(諱之秘之)’는 ‘꺼리고 또 숨긴다’는 뜻이다. 즉 사람들의 입에 자꾸 오르내리는 것을 꺼려서 드러나지 않도록 숨긴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의 ‘휘지비지’가 발음이 와전되어 ‘흐지부지’가 되었다. 어영부영이란 말은 조선시대 군영(軍營)인 어영청(御營廳)에서 나온 말이다. 어영청은 원래 기강이 엄격한 정예부대였는데 조선 말기가 되면서 군기가 해이할 대로 해이해져서 형편없는 군대가 되고 말았다. 이런 군대를 본 사람들은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다”
라는 뜻에서 ‘아닐 비(非)’자를 써서
“어영비영(御營非營)”
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 이 발음이 와전되어 ‘어영부영’이 된 것이다. 흐지부지하거나 어영부영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29명의 생명을 앗아간 큰 화재가 있었다. 원인 조사를 흐지부지해서도 안 되고 규명된 원인에 대한 처리를 어영부영해서도 안 된다. 시비를 분명히 가려 끝까지 마무리를 잘해야 비극이 재발하지 않는다.
"폭염을 자연 재난에 포함해야 한다는 법 개정 요구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흐지부지됐었다."
『흐지부지』는「諱之秘之(휘지비지)」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꺼려져[諱 : 꺼릴 휘] 드러나지 않도록 숨긴다[秘 : 숨길 비]’는 뜻이었는데, 『흐지부지』로 바뀌면서 ‘확실하게 끝맺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넘기는 모양’이라는 뜻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굳이 어원을 모르더라도 『흐지부지』라는 단어의 구조로 보아 ‘애지중지(愛之重之), 감지덕지(感之德之), 좌지우지(左之右之)’등의 한자어들과 구조와 비슷하니 한자어일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족을 단다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새로운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새 달의 시작을 맞이할 때마다 모든 일을 흐지부지 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는 것은 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위로해본다.
'우리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단의 통일성 (2) | 2023.10.11 |
---|---|
문단의 긴밀성 (2) | 2023.10.11 |
외래어투의 말들 어떻게 쓸 것인가? : 뜨거운 감자, 벼룩시장 (1) | 2023.10.10 |
<표지, 표시> 쓰임새 (1) | 2023.10.09 |
<파문, 파동, 파장> 쓰임새 (0) | 2023.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