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엄하셔서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해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의 말을 해석해 준다는 유머 사이트에 따르면 데이트 상대가 맘에 들지 않을 때 거절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때 ‘엄하다’는 규율이나 예절을 지키는 태도가 바르고 철저하다는 뜻이다. ‘엄격하다’로 바꿔 쓸 수 있다. ‘학생들에게 엄한 선생님’ ‘싸우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엄하게 일렀다’처럼 쓰인다.
그런데 이 ‘엄하다’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하라는 숙제는 않고 엄한 짓만 한다’거나 ‘멧돼지 잡으려다 엄한 사람 잡겠네’ 같은 데 쓰인 ‘엄한’이다. 이때는 물론 ‘엄격하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엄한’이 아니라 ‘엉뚱한’의 뜻을 지닌 ‘애먼’으로 써야 맞다.
‘애먼’은 ‘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엉뚱하거나 억울하게 느껴지는’을 뜻하는 관형사다.
"애먼 사람이 누명을 썼다"
"애먼 짓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
처럼 쓴다. ‘애먼’과 비슷한 뜻으로 쓸 수 있는 말에 ‘애매하다’와 ‘앰하다’가 있다. ‘애매하다’는 모호하다, 즉 분명하지 못하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뜻의 ‘애매하다’와 달리 아무 잘못 없이 누명을 쓰게 돼 억울하다는 뜻의 ‘애매하다’가 따로 있다.
우리 속담 중에 ‘애매한 두꺼비 돌에 치었다’거나 ‘천 냥 시주 말고 애매한 소리 말라’ 등에 쓰인 ‘애매하다’가 바로 그것이다. ‘앰하다’는 이 ‘애매하다’가 줄어든 말이다. ‘앰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마라’거나 ‘잘못한 것도 없이 어머니께 앰하게 꾸중을 들었다’처럼 쓴다.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지만 ‘엄한’과 ‘앰한’ ‘애먼’은 구분해서 써야 한다. ‘엄격하다’의 뜻에는 ‘엄한’을, 억울하거나 엉뚱하다는 뜻으로 쓸 때에는 ‘애먼’이나 ‘앰한’을 쓴다.
말은 세월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규범이 정해지는 것도 결국 말의 시장에서 어떤 형태가 살아남느냐에 따른 결과다. 그것이 이른바 '표준어'이고, 맞춤법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무리 흔히 쓰는 말일지라도 규범과 다르다면 우리는 그 말을 짝사랑하고 있는 꼴이다. 그렇지만 다행히 말에 관한 한 영원한 짝사랑은 없다. 말이란 궁극적으로 공급자이자 수요자인 언중(言衆)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가령 '가을이 영그는 들판' 같은 표현은 그전에는 '가을이 여무는.....'이라고 해야만 표준어법에 맞는 말이었다. '가슴을 덥히는 훈훈한 인정'이라고 하면 틀리게 쓴 것이고, '가슴을 데우는......'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었다. 자식한테 '아들아, 네 꿈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라'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아들아, 네 꿈의 날개를 .....'이라고 해야 교양 있는 사람이고 배우 사람으로 취급 받았다. 또 한껏 멋들어지게 '들녘 가득한 봄 내음'이라고 써 봤자 그것은 틀린 말이고 '들녘 가득한 봄 냄새'라고 해야만 맞는 말이었다. 다만 표준어법대로 따르자니 도무지 말맛이 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줄기차게 써 오던 '영글다, 덥히다, 나래, 내음, 뜨락' 같은 말이 함께 표준어로 인정받았다. 무론 그러기까지 오랜 시일 말의 시장에서 '사랑받기 싸움(말들 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이 밖에 '미류나무 → 미루나무, 강남콩 → 강낭콩, 미싯가루 → 미숫가루' 따위는 이제 어원의식이 희박해져 굳이 본래 말을 살려 쓸 필요가 없을 만큼 뒷말이 언중의 입에 정착한 경우다. 이런 때는 아예 그 전 말을 버리고 새로 변화된 형태의 것을 표준으로 잡는다. 대개는 방언으로 있던 것이거나 단순히 발음상의 차이로 말의 형태가 바뀐 게 많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 가운데 어원이 분명함에도 잘못 입에 오르내려 굳어가는 말이 꽤 있다. 가령
"엄한 사람 잡지 마라."
"엄한 소리 하고 있네."
라고 할 때의 '엄한'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때는 '애매하게 엉뚱한, 즉 아무 잘못이 없거나 관련이 전혀 없는데 억울하게'라는 뉘앙스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사전에서 아무리 '엄하다'를 찾아봐야 그런 뜻은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잇는 한자어 엄(嚴)하다와는 관련이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정체는 무엇일까?
이 말은 '애먼'이란 고유어가 잘못 알려져 쓰이는 것이다. '애먼'은 엉뚱하게, 애매하게 딴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애먼 사람 욕먹게 하다"
처럼 쓰인다. 그 여원은 '애매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순우리말 '애매하다'는 '아무 잘못이 없이 원통한 책망을 받아 억울하다'란 뜻이다. 이 말이 줄면 '앰하다'가 되는 데 여기서 하나의 관형사로 굳은 '애먼'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애매한>앰한>애먼'의 과정을 거친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엄한 사람 잡지 마라'는 '애먼사람 잡지 마라'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물론 언젠가 '엄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세력을 얻는 반면 '애먼 사람'은 계속 외면당한다면 그때 당당히 표준어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자장면보다 짜장면을 압도적으로 사용하다보니 복수표준어로 짜장면이 드디어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아마 머지않아 자장면은 사라진 말이 되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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