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식 신발’ 고무신의 탄생
1884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Allen, 1858~1932)이 남긴 일기책을 보면, 갑신정변의 와중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자신의 고무장화를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애를 먹는 장면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고무’ 재질의 신발과 관련한 가장 빠른 기록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아는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한참 늦은 시기의 일이다.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는 고무신의 첫 등장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하는 표현은 곧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표기이며 발음 역시 ‘고무’이다.
“호모화의 유입은 1919년경부터 개시되어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소량에 불과했으나, 1921년 봄 무렵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자마자 별안간에 조선인들의 환영을 받아 도시에서 시골로 보급되고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글은 조선총독부 상공과에서 직접 정리한 자료이므로 내용의 정확성은 비교적 높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단화형’으로 시작되어 일본에서 만들어 수입한 ‘조선식 신발’ 형태의 것이 그 뒤를 이어 나타났던 것을 알 수 있다.
느닷없는 고무신의 등장이 뜻밖의 대 유행을 이끌어내자 너나 할 것 없이 짚신을 팽개치고 고무신 한 짝을 갖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고무신의 색깔도 백색, 흑색, 적다색 등으로 다양해지고, 갖가지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에서도 고무신 제조공장이 우후죽순 격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선 것은 이하영(李夏榮, 1858~1929)이 설립한 ‘대륙고무공업’이었는데, 이 회사가 내건 당시의 광고 문안에는 흥미롭게도 창덕궁의 순종 임금과 각 궁가 및 궁녀들이 모두 대륙고무가 만든 고무신을 애용한다는 사실을 판매 전략의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고무신의 빠른 보급은 곧 기존 신발의 쇠퇴를 의미했다. 고무신의 위세 앞에서는 서양식 구두는 물론이고 기존의 짚신과 조선신발 역시 똑같은 처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고무신이라 하더라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고무라는 재질이 우선은 질기기는 하지만, 도무지 땀이 빠져나가지를 않으니 위생의 관점에서는 빵점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고무신 중독으로 인해 어린 아이와 여학생들의 발에 종기나 부스럼이 나 문제를 일으킨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신문지상을 장식하기도 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국민 신발’ 고무신
그런데 이러한 고무신의 전성시대를 되돌려놓기라도 하는 듯이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 기사에는 뜻밖에도 보통학교 아동들을 중심으로 고무신 배척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등장했다. 고무신을 신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경제적일지 몰라도 나라 전체로는 외국에서 원료를 수입해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이니 결국 손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을 삼아서 신자는 것은 실상 전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한층 어려워진 경제사정 때문에 자력갱생(自力更生)과 자급자족(自給自足)을 구호처럼 외쳤던 식민통치자들의 시국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일제패망기로 접어들면서 전시체제의 강화와 전반적인 경세사정의 악화로 짚신과 나막신, 심지어 일본식 게다(일본식 나막신)의 착용을 장려하는 일은 지속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고무신의 몫이었다. 결국에 짚신애용운동이란 것도 농촌지역에나 어느 정도 먹히는 이야기였지, 도회지 쪽에서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었다. 고무신의 인기비결은 무엇보다도 값이 싸고 질기다는 데에 있지 않았던가. 돌이켜 보면 고무신이라는 존재가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온 지는 90여 년 남짓한 세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질 좋은 운동화나 정장구두, 그리고 각종 기능화가 널리 보급되다보니 구태여 이것을 신을 일도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주 해묵은 우리네의 전통생활용품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함께 나눈 핍박과 고난의 시절이 깊고도 길었던 탓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네의 심성이나 고무신이나 끈질긴 것으로 치자면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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